한국일보

쿠스코 - 잉카의 심장, 돌 위에 새겨진 영혼

2025-05-22 (목) 04:08:21 제프 안 AKI 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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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 잉카의 심장, 돌 위에 새겨진 영혼

황성 옛터와 시가지 모습.

안데스 산맥의 고요한 품 안에 안겨, 해발 3,400미터의 고지에 숨 쉬는  쿠스코(Cusco)에 도착했다. 소박한 공항에 내리기 전 창밖에 보이는 장엄한 안데스 산맥과 계곡 정상에 자리잡은 아슬아슬한 활주로의 위태로운 모습이 맥박을 재촉한다. 막상 공항에서 빠져나오니 고산지대라서 건물색상들과 꽃들의 화려한 자태가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마치 백내장 수술을 받은 느낌.  쿠스코는 태양의 자손이라 불렸던 잉카 제국의 수도이자, 우주를 향한 고대의 기도가 서려 있는 성스러운 심장이다.
 
영광의 중심, 태양의 도시

쿠스코는 잉카 제국의 중심이자 ‘네 개의 길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의 타완틴수유(Tawantinsuyu),  도시의 구조는 푸마(스라소니)의 형상을 본떠 설계되었고, 태양신 인티(Inti)를 모시는 코리칸차(Qorikancha) 신전은 황금으로 뒤덮여 신성함의 정수를 보여준다. 천천히 빼곡히 돌로 새겨진 보도를 걸어 올라간다. 숨이 가팔라지며, 약을 복용했음에도 고산증 증세가 몰려온다. 길옆 상점을 지나치는데 전통 잉카 복장의 여성이 코카잎 차 한 잔과 싱싱한 오렌지를 건넨다. 이런 건 마다 못하는 것이 제프다. 티 한잔보다 그녀의 투박함에 시원한 막걸리 한잔이 그리워졌다.
 
잉카인의 손때와 시련

냉동 안 된 오렌지임에도 당이 높아 갈증을 해소시켜주었고 돈을 건네받는 여인의 손톱에 검은 때가 먹물처럼 선명하다. 순박한 웃음을 보였지만 그녀의 모습이 삶을 대변해준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망국은 사라졌어도 옛 궁전의 토대들은 보존되어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위층의 돌들은 성당 건설과 타 용도로 재활용하고 기반에 들어간 거석들은 건드리지 않은 결과다. 거대한 석조 벽과 정교하게 맞물린 돌들은 깎아낸 모습이 완벽했고, 지진조차 거스를 수 없는 석조기술은 자연과 인간의 경외의 합작품이다. 이집트 기자와 룩소에서 보았던 거대 석조 건축물이 떠올랐고, 그곳이나 여기나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허무함이 공존하는 모습이다. 이 도시는 단순한 행정 수도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 신과 인간,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영적 회랑이다.
 
패망의 순간, 돌 위에 스민 눈물


1532년, 스페인의 침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잉카 황제를 생포한 후 황금을 대가로 받은 후 잔혹하게 처형해버렸다. 1533년에는 불과 180명의 정예 병력으로 수십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잉카제국을 무력화시키며 쿠스코를 함락시켰고 찬란하던 황금 신전 역시 완벽하게 약탈당했다. 잉카의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는 조선의 마지막 황후가 그랬듯 허무하게 죽는다. 문자가 없던 그들은 그 순간조차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고 수많은 잉카인들은 내부분열과 병마(천연두)로 쓰러졌다. 돌 위에 스민 눈물과 관광객들의 손때로 반질반질 하게 빛을 발하는 거석들만이 무심히 침묵하고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잉카궁전 위에 산토도밍고 수도원을 세우며, 문명의 우열을 돌 위에 선언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반은 여전히 잉카의 돌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돌들은 당당히 제자리를 지키며 잊히지 않은 기억처럼 남아 있다. 
 
남겨진 것들, 잊히지 않는 것들-쿠스코 대성당과 아르마스 광장

쿠스코 돌담 골목길을 걷다 보면, 벽을 이루는 돌 하나하나가 시가 된다. 종이 한 장 안 들어가는 열 두 모서리의 돌,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석조의 결은 마치 천년의 서약처럼 단단하다. 1559년 시작하여 95년 만에 완공한 바로크와 고딕 혼합의 웅장한 쿠스코 대성당은 그 위용이 대단했다. 내부에는 ‘최후의 만찬’을 묘사한 유명한 그림이 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탁 위에 기니피그(들쥐)가 올라있다. 스페인 종교화에 토속적 요소가 가미된 사례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  성단제단은 페루 광산에서 나온 은들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는데 눈부심이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과 너무 대조된다. 성당을 나와 아르마스(무기라는 뜻) 광장으로 나오니 옛 잉카 종교의식 공간 위에 스페인의 성당, 정복자들의 저택과 정부청사들이 세워져 있다. 스페인의 상징적 지배공간이다. 
 
역사는 아이러니

광장 한복판에 잉카 황제 파파쿠텍 동상이 자랑스럽게 서있다. 식민지의 상징이었던 광장에 몰락한 잉카제국의 황제가 상징처럼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광장에는 알파카 제품을 판매하는 호객꾼들로 바빴다. 관광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와 쇼핑. 멀리 경찰관들의 눈빛이 살벌하건만, 한인인 것을 알아보고 모두 달려와서는 물건을 안긴다. 순간을 안 놓치고 아내도 하나 건진다. 단돈 $25의 사치는 눈감아주어야 한다. 

어느새 나타난 정복경찰들이 소리치며 상인들을 쫓는데 긴박하게 도망가는 여 상인들의 모습이 옛 시장에서 보았던 우리네 아낙들의 모습 같아 가슴 찡하다. 쫓기어 달아나는 여성들을 바라보며 아내 입에서 “하나 더 사줄 걸…” 안타까운 마음이 전달된다. 또 발걸음을 옮긴다. 밤이 되면 별이 빛나는 산 위로 달이 떠오르고, 그 은은한 달빛은 쿠스코의 잿빛 돌담을 어루만진다. 이 도시는 폐허가 아니다. 마침표도 아닌 쉼표로 남은, 살아 있는 전설이다. 저녁식사로 기니피그를 맛보았는데 원주민들이 느끼는 맛은 아닐 것 같다. 
 
그리고 나의 발걸음은…

나는 그 돌들 사이를 걸었다. 내 조국의 옛 기와지붕과는 전혀 다른 돌의 결을 느끼며,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물었다. 피사로의 말발굽 소리는 사라졌지만, 잉카의 발자국은 아직도 그 골목마다 깊이 패여 있었다. 바람은 말을 잃었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한 문장을 떠올렸다. “돌은 말을 하지 않지만, 영혼은 돌 위에 머문다.”
귀를 석벽에 바짝 붙이니, 쿠스코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너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가? 답 대신 돌 벽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며, 나 역시 잊히지 않기를 기도했다.

<제프 안 AKI 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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