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인 아버지로서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신념으로 미국 이민을 하게 되었다. 이민생활이란 아픔과 즐거움, 울고 웃는 삶의 연속이다. 가족에게 깊은 사랑의 표현도 못했다. 각자 이국땅에서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열심히 살아가는 삶을 익히고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보며 대견스럽고 흐뭇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급변하는 시대다.
아버지로서 가족에게 무엇을 남겨줘야 하고, 값지고 보람찬 미래의 꿈을 갖도록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그저 돈만 벌겠다는 욕심에 아버지의 역할을 생각할 시간도 없이 보냈던 것이 후회스럽고 부끄러웠다. 이를 아쉬워하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두란노 아버지학교에 등록했다.
수업의 목적: 첫날 수업은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라는 슬로건 아래 아버지의 정체성 있는 역할로 가정을 돕고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가장인 아버지의 영향력, 희생, 사랑, 존경, 배려심 등을 유지하면서 계승한다는 주제의 내용이었다.
수업에 참가한 사람들의 나이와 이유들은 각각 다르고 복잡했다. 그러나 모두 아버지의 역할을 잘 정립하여 가정의 회복을 돕고, 이론이나 지식이 아닌 삶의 숙제를 풀고 완성시켜 보람찬 삶을 도모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3개 조: 각 조마다 다섯 명씩 나누어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력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나누며 자녀들과 가족에 끼치는 사명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특히 아버지의 사명에서는 존경받는 남편이 되고, 자녀의 미래를 위해 서로의 삶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자녀의 자랑스러운 점, 아내가 자랑스러운 이유, 가족들에게 꾸준히 편지를 써보고 노력하며 익숙해지면 아버지의 행복과 건강을 찾게 되어 결국에 “아버지가 건강해 가정이 건강해 진다.” “아버지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해 진다”라고 배우고 익혀 가자고 했다.
아버지의 허그(hug): 허그에 익숙하지 않는 나는 어느 나라 생활문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고 한참 생각해 보았으나 알 수가 없다. 허그는 사랑과 축하의 표시, 반가움과 위로의 표시 등으로 악수 대신 어린아이들에게만 권했는데, 이곳에서는 나이 들어 익숙지 않은 허그로 정을 나누고 인사하는 방법을 익혔다. 더욱이 가볍게 껴안으며 등을 문지르는 것은 상관없지만 등을 두들겨 주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항상 격려하는 뜻으로 가볍게 두들겨 주는 습관이 있었는데 알 수 없는 허그 같았다.
종교의식(종교의식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매번 시작부터 박수치며 부르는 찬송가와 기도의 예식에 당황스러웠다.), 불태우기 예식(불행한 일 또는 기억하기 싫은 일들을 하트 모양의 종이에 적어 소각시키는 예식), 촛불 예배(촛불을 켜고 촛불 같은 아버지의 축복이 빛이 된다는 뜻을 가진 예식), 세족예식(부부 간에 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어 주는 예식), 이 3가지 예식 중에 예수님이 제자에게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고 서로 삶의 가치를 가르쳐 주는 좋은 예식이었다. 온 가족이 흐뭇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모두 즐거워하고 깊은 감명을 받는 시간이 되었다.
식사 시간: 식사시간은 즐거웠다. 매일 먹는 식사이지만 주말인 토요일과 일요일에 만나 원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즐기며 대화를 나누었다. 대담 전의 처음 만남은 남과 남(you and you), 그것과 그것(it and it) 속에서 대화가 오가며 서로 서로 알게 되면서 너와 나(you and me)의 관계가 되어가며, 가족에 주는 사랑과 가족을 알게 되는 관계 속에 영원한 너(God)를 알게 되고 숭배 하는 신앙을 갖게 되는 귀중한 식사 시간이었다.
가족 만남의 시간: 마지막 날에 가족들이 같이 참석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온 가족이 모여 유머 있는 대화도 많았지만 젊은 부부들의 다정한 모습과 정다움으로 삶이 긍정적인 느낌을 받으며 기뻐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나는 스스로 명상하는 시간에 작은 사랑이라도 가족을 위해 더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 것을 다짐했다. 그래서 더 좋아지는 생활이 되고 사회적 책임이 강해지면서 더욱 자랑스러운 가족이 되기를 빌어 보았다. 나이 들어가는 이 고목은 언제 쓰러질 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도 가족의 삶에 버팀목이 되고, 가족의 사랑과 화목이 깃든 유산을 남기고 싶은 짧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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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페어팩스,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