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같은 문화의 뿌리를 공유한다. 언어도 스랍어(Slavic)로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하고 종교도 러시아 정교(Russian Orthodox)로 같다. 1991년 소련연방이 해체될 때까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연방이었고 인구의 38.2%가 러시안이다.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 정부로서는 불가피한 방어전이지만 러시아 국민이 일반적으로 전쟁의지가 없는 것은 당연한 민심으로 풀이한다. 푸틴의 전쟁일 뿐이다.
이러한 국민적 공감대는 월남전 당시의 월남국민의 마음이었다고 회고한다. 1969년부터 2년간 미군 군납업체 사이공 지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북한의 러시아 파병과 한국의 월남파병을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한국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연인원 346,393명을 파병했다. 맹호사단, 백마사단, 청룡부대, 비둘기부대, 십자성부대, 해군 백구부대, 공군지원단을 주월사령부가 통합 지휘했다. 주말에는 아직 현역으로 주월사에서 근무하던 동기생과 함께 했다. 매주 미군, 한국군, 월남군 수뇌부의 작전회의에서 토의한 비밀이 월맹군에 누설되는 걸 알고 나서는 작전을 미군과 한국군만 모여서 토의했다고 한다. 월남군 수뇌부가 월맹군에 대한 적개심이 없는 것이 우리에게는 믿어지지 않았다. 러시아 국민이 전쟁 중에 있는 적국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 이유는 다르지만, 적개심이 없는 것은 같은 상황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녁때 나는 노변주점에 앉아서 이웃주민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이들은 미국을 비롯해서 이렇게 많은 외국인이 왜 월남에 와있는지 모른단다. 호치민을 존경한단다. 서울 한복판에 앉아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꼴이다. 월남군 장군이 월맹군 지휘부와 내통이 가능한 문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월남전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음을 알았다.
1975년 월맹군은 거리낌 없이 Saigon에 입성하여 독립궁(대통령궁)과 정부를 접수한다. 월남전에서 승리하겠다고 고집한 존슨 대통령에게 맥아더 장군이 정확한 조언을 한다. “월남전은 집안싸움이다. 미국이 관여할 전쟁이 아니다”는 조언이다.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에 따라서 한국의 입장이 심각할 수 있음을 부언한다. 한국은 미국의 우방으로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반면 러시아의 우방으로 파병되는 북한군과 대적할 경우를 우려한다는 말이다. 근시적(近視的)으로는 여하한 방법으로라도 북한을 멸하고 싶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풀이한다.
요즘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은 날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북한은 자멸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군 월남 참전에는 명분과 경제적 국익에 기여한 결단이었다고 평가한다. 6.25 전쟁 때 한국을 도와준 미국과 우방에 보은하는 명분도 있었고 월남전에 필요한 용역사업을 한국기업이 수주함으로써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진재벌은 월남전으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지원으로 한국군의 장비를 근대화한 것도 월남전 파병으로 이루어졌다. 보병 기본화기 M1 소총을 M16으로 교체한 것도 그때였다. 한국군의 야전용 식품 K Ration도 미국이 제공했다. 한국군 장병의 급료도 미국이 미화로 한국정부에 지불하고 정부가 한화로 장병에게 지불함으로써 외화를 확보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Russo-Ukraine 전은 명분도 실리도 없는 싸움으로 판단한다. MacArthur의 조언같이 끝내야할 전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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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탁 변호사/ 페어팩스,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