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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레인 에번스 의원 10주년 추모일을 기리며

2024-11-07 (목) 서옥자 한미국가 조찬기도회 이사장 / 메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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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방문하고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중요한 회의를 며칠 참석하느라 여유가 없어서 고 레인 에번스의원 10주년 추모 행사를 제대로 준비 못하고 추모일(11월 5일)을 맞이했다.

벌써 그가 떠난지 10여년이라는 세월이 되었다. 그를 가슴에 품고 못다한 이야기를 오늘도 써 내려가면서 나의 삶을 되돌아 보며, 또한 앞으로 헤쳐 나갈 남은 날들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해 본다.

돌아보건대 그에게는 ‘약자의 영웅’ 또한 ‘한국인의 친구’라는 호칭이 늘 따라 다녔다. 언제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어준 그의 유산을 이어 받아 나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일리노이 중서부 록 아일랜드 그의 고향에서 어느 가을 날, 샛노랗게 물들어진 은행나무들의 찬가가 울려퍼지는 숲속으로 그는 그렇게 사라져 갔다. 그가 파킨슨 병에 도전하며 숲속으로 용감하게 뛰어 가던 뒷모습이 그려진다.


24년간의 의정 활동을 하면서 연방 하원 의원도 평민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겸허한 자세로 국회에서 지급하는 은퇴 연금도 거절한 청신한 민중의 공복이었다. 마지막 힘들게 찾아 간 그의 모습은 공인 양로원에서 다른 노약 환자들과 함께 버림 받은 채 휠체어에서 눈 감고 있던 모습이었다. 그전에, 본인이 내게 전화를 걸 수도 없는 열악한 몸 상태에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어쩌다 힘들게 워싱턴에 있는 나와 통화가 되면 “내 나이 60에 보고 싶은 사람 못 만나게 하며 자유없이 갇히고 산다” 며 통절해 하던 그의 절규에 나의 가슴은 무너져 내리곤 했다. 소위 법정 후견인이라는 명목아래 불쌍한 환자의 바람을 무시하고, 인권, 자유를 짓밟는 사례가 미국 사회에 생각보다 많다고 들었다. 원하지 않게 마비되어 가는 몸과 정신은 운명의 굴레 위로 뒹굴며 가버렸다.

지난 달, 나의 모교인 정신여고에서 자랑스러운 정신인 수상이 있어서 며칠간 서울에 묵는 동안, 시간을 쪼개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님과 시간을 보내고져 대구에 내려갔다. 모 신문 논설위원이 내게 선물로 전해 준, 유명 배우 차인표씨가 쓴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을 대구행 KTX 안에서 읽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기쁨과 감사로 출렁이었다. 한 권은 할머님께 전해드리고 다른 한 권은 대구의 열성파 유지, K병원 원장님께도 드렸다.

이 책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쓰이는 한국학 필수 도서로 선정되어 있는 책이다. 그만큼 용서와 화해는 글로벌한 이슈인 것 같다. 대구에서 몇 지인들과 이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모두가 만장일치로 이제는 할머님 94세, 이 세상 떠나시기 전에 일본의 과오를 용서해 주는 것이 멋지게 이기는 것이라고 마무리했다. 나는 이 용서와 화해의 문제에 대하여 이용수 할머님과 2년전부터 대화를 나누어 왔다. 어떤 운동가들은 나에게 돌을 던지기도 하겠지만 역사를 바꾸자는 게 아니다.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어떻게 이끌고 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상대가 빌지도 않은 용서를 어떻게 해야할까.

이 책에서 말했듯이 용서는 빌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보기에, 그 따듯한 별을 부끄러움 없이 바라보기 위하여 용서와 치유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할머님의 마음은 아직도 고민을 하시는 듯 싶었다. 우리 모두가 어떤 인연으로 만나 어떻게 헤어지든 서로의 상처를 용서하고, 화해가 이루어지는 날들이 오기를 바란다.

이렇게 가을은 우리에게서 다시 멀어져 가고 있는데.

<서옥자 한미국가 조찬기도회 이사장 / 메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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