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11월 5일은 ‘가이 포크스의 날(Guy Fawkes Day)'이다. 저녁에는 영국 곳곳에서 불꽃놀이 축제(Bonfire Night)가 벌어지고 젊은이들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폭죽을 터뜨리며 거리를 행진한다.
420년 전 1605년 어느 날, 가톨릭 신도인 ‘가이 포크스'와 그의 동료들은 가톨릭을 탄압하는 국왕 제임스 1세가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서 연설하기로 예정된 11월 5일에 의사당을 폭파해 왕과 의원들을 모두 암살하기로 모의했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인 의원을 미리 피신시키려던 동료 한 사람의 편지가 발각되어 의사당 폭파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 가이 포크스는 목에 밧줄이 걸린 채 교수대에서 스스로 뛰어내려 죽었고, 그의 동료들은 교수척장분지형(絞首剔臟分肢刑)으로 죽음을 맞았다. 목을 매달고 내장을 발라내고 팔다리를 절단하는 끔찍한 처형이었다.
가이 포크스의 불꽃놀이 축제에는 암살을 모면한 것에 대한 안도감보다 가이 포크스의 실패를 아쉬워하는 민중의 안타까움이 더 짙게 배어있다.
235년 전 프랑스혁명(1789) 당시 베르사유 궁전으로 쳐들어간 파리 시민들은 국왕 부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왕궁에서 끌어내 단두대에서 처형했다. 4.19혁명을 일으킨 시민 학생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저항의 행진은 언제 어디서나 권력의 심장부인 왕궁이나 대통령관저로 향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가이 포크스와 그의 동료들은 왕궁을 노리지 않았다. 국회의사당을 노렸다. 국왕이 의회를 방문하는 날에 의사당을 폭파해 왕과 의원들을 모두 암살하기로 모의했다. 가이 포크스 일당은 왜 의원들에게까지 테러를 감행하려고 했을까?
가이 포크스와 그의 동료들은 왕권을 견제해야 할 의회가 국왕의 가톨릭 탄압을 저지하기는 커녕 오히려 동조하는 아이러니를 왕권의 횡포와 똑같은 자유의 적(敵)으로 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곧 의회민주주의다. 의회가 부패하면 정치가 타락하고, 정치가 타락하면 헌정질서가 무너지고, 헌정질서가 무너지면 나라가 망한다.
입법부의 모든 입법은 헌법정신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국회가 바른 자리에 서지 않으면 헌정질서도 바로 서지 못한다. 국회의 입법권은 국민의 주권을 넘어설 수 없다. 국민은 국법체계의 최고권력인 헌법제정권력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먼저 정신 차려야 나라가 잘 된다.
서구역사상 가장 강대한 국가였던 로마제국은 동서 두 나라로 분열된 뒤 서로마는 게르만족에게, 동로마는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 당했다. 게르만이나 오스만투르크가 로마보다 강해서만은 아니었다. 로마가 안에서부터 썩어갔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안에서부터 멸망하게 되는 이유에는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건전한 시민사회의 붕괴 등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정치인들의 부패와 무능이 큰 몫을 차지한다.
권력은 민심을 이기지 못한다. 민심은 천심이다. 민심을 배반하고 무시하는 정권은 반드시 실패한다. 정적 제거에 올인하다가 피눈물을 흘리는 정권을 보아왔다. “두려운 마음으로 임하라. 그렇지 않으면 민중이 엎어버린다.” 주역(周易)에 있는 말이다.
“수소이재주 역소이복주(水所以載舟 亦所以覆舟)." 백성은 물과 같다.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 당(唐)나라 정치가인 위징(魏徵)이 ‘정관정요(貞觀政要)’란 책에서 민심을 ‘물’에 비유한 말이다.
리더는 나라를 운영하는 데 있어 법(法)이라는 규율을 만들어 국민을 이끌어 간다. 그러나 법보다 더 앞서는 게 있다. 바로 마음이다. 국가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민심(民心)은 백성의 마음을 뜻한다. 국민의 마음 즉, 여론(輿論)이다. 다시말하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다. 국민들이 나타내는 공통된 의견이다.
예부터 ‘민심은 천심(天心)’이라고 했다. ‘백성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라는 얘기다. ‘백성의 뜻’이 ‘하늘의 뜻’과 같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이다.
서경(書經)에서 또 말하기를, ‘하늘이 보는 것은 백성들로부터 보고, 하늘이 듣는 것은 백성들로부터 듣는다'라고 했다. 백성들의 반응이 곧 천명이라는 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심을 얻은 자는 천하(天下)를 얻었다. 반대로 민심을 잃은 자는 천하를 잃었다. 역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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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모 페어팩스,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