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두 마리가 좌우 기둥을 휘감고 있다. 의학적 상징인 ‘헤르메데스’의 지팡이 모습이다. 이는 바로 좌우의 대립적 모습이면서 서로 보완적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 주변은 어느 누리를 막론하고 쇠코에 땀이 나듯 이념 바이러스, 스포츠 바이러스, 종교 바이러스, sex 바이러스 그물에 걸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후천적 결핍증 본능에 충실하여 상대는 무시당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지식인들은 어떤가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4년 교육은 간서(看書)들이 많아 치(癡)가 되어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헤르메데스의 대립과 보완적 조건이 있는데도 결과가 없는 그림자 같은 지식 아닌 지식이 넘쳐 익힌 음식이 날것으로 돌아 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탁성(鳥啄聲)에만 귀를 기울여 국헌이 문란하며 가을 동풍 앞의 등잔 불 모양 존망지추(存亡之秋)에 이르렀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말한 셰익스피어의 말이 가을 아침 찬 바람에 섞여 목덜미 옷을 여미게 한다. 머리 말이 길었다.
광고를 보니 태영호 ‘통일 강연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한 마디 말하고 싶다. 워싱턴 한인을 뭘로 보고 그런 사람을 초청하여 편을 가르나. 시대의 변화에 무지스런 평통의 편 가르기 대상이 되어야 하나?
태영호는 배반의 공로로 거금을 받고 매달 봉록을 받으면서 그 아들은 사기 기술을 배워 수억 원을 뜯어 살이 찌고 있다. 용산의 급한 불을 워싱턴에서 끄겠다고? 태영호와 그 아들의 비위는 윤 대통령의 어리석은 해프닝으로 끝내야 한다.
사람의 마음 속에 배반으로 얻어진 이익이 있다면 반드시 그 사람은 더 큰 이익을 위하여 항상 배반할 기회를 노린다.
민주적 평화 통일을 위한 통일 정책 수립과 추진에 관해 대통령에게 건의 하고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평통 위원들의 의무이다. 워싱턴 한인들을 만만하게 여기는듯 십자 고상 앞에서나 평통 깃발 아래서 간증과 강연의 나팔을 불어 댄다.
유태인 프리츠 하버라는 사람은 1915년 세계 최초로 독 가스를 개발하여 노벨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독 가스는 같은 민족 유태인 600만명을 굴뚝의 연기로 사라지게 하는데 엄청난 공을 세웠다. 결국 자기의 업적이 자기 민족을 죽이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이다.
태영호의 배반이 호불호(好不好)를 떠나서 집회, 간증, 강연이 남북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의 도화선이 안되길 간절하게 바란다.
현재 남북한은 악어와 악어새 또는 프로메데스의 지팡이 또는 기독교의 칠지 촛대 모습으로 서로 보완하며 살아 내야 한다. 남북 전쟁으로 모두 부서지고 죽은 다음의 승리 기도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태영호 강연은 분명 정신 나간 편견에 정신 나간 이념에 정신 나간 현실의 왜곡일 것이다. 큰 사건이 발생하기에 앞서 같은 종류의 작은 사건이 일어나는 증상을 하이에나의 법칙이라고 한다. 1, 2차 세계 대전도 작은 사건에서 일어나 천만명을 넘게 죽인 세계전쟁으로 벌어졌다.
태영호의 마타도어(흑색 선전) 세치 혓바닥 놀이가 하이에나 법칙이 안되길 바란다. 아울러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어 상대를 무시하는 확증 편향을 평통 스스로 인정한 꼴이다. 훈도시에 나막신을 신고 일장기를 흔들며 기미가요를 부르는 모습이다.
피륙을 짜는데도 한가지 실이 아니라 온갖 실이 필요한 법이다. 민심 조변석(民心早變夕)이라고 했다. 민심은 실망하면 바로 돌아선다는 옛 말은 우리가 박근혜에게서 본대로다.
워싱턴에서 아리랑을 불러야지 아메리칸 파이를 불러야 되겠나?
지금 남북한은 죽은 소녀를 살린 예수의 말 한마디가 절실히 필요하다. 예수의 말 ‘달리다굼’이다. 소설 25시의 마지막 문장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로 점을 찍는다. 나의 설왕설래 마지막 문장은 “주여 지금 어디 계십니까"로 점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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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락빌,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