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숭산보다는 지산동고분군 쪽으로 돌면 합천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하다. 현재 고령에서 합천으로 이어지는 26번 국도도 고분군 아래쪽 하천을 따라 연결돼 있다. 이운순례길에 포함되지 않지만 높은 고개가 없어 좀 돌더라도 이 길을 택했을 듯하다.
대가야(42~562년) 지산동고분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가야고분군 중에서 밀집도나 규모가 다른 지역을 압도한다. 금산재에서 보듯 대가야 읍내 뒷산(주산) 능선과 남쪽 사면이 고분으로 덮여 있다.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처럼 고령에도 대가야 건국신화가 전해온다. 조선 초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간단히 소개돼 있다.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산신이자 여신이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왕을 낳았다는 이야기다. 대부분 남성이 주인공인 고대국가의 건국 신화와 차별화되고, 금관가야와 묘하게 경쟁 관계가 느껴진다. 고분군 아래에 위치한 대가야박물관에 그 역사와 고분군 출토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토기와 철기, 금관과 장신구, 무기와 갑옷 등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산에 상세 해설이 곁들여져 있다.
박물관에 걸린 대가야 지도가 흥미롭다. 수도인 고령은 동쪽 귀퉁이에 붙어 있지만 서쪽으로 순창 임실, 북쪽으로 진안 무주까지 대가야의 영역이었다. 남쪽으로는 하동 여수 순천을 아우르고 있다. 지금의 전라도 동부, 경상도 서부 지역이 모두 대가야 땅이었다.
백제와 신라 사이의 대가야는 결국 두 나라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6세기 초 백제 무령왕은 가야연맹에 속했던 전라 동부 지역을 손에 넣는다. 대가야 이뇌왕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지만 오히려 분열 계략에 말려 결국 562년 신라군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가야의 역사가 의도적으로 축소되고 지워졌으리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꿰어 맞추기 힘든 파편 조각처럼 여전히 수수께끼 왕국이다.
박물관을 둘러봤다면 본격적으로 고분 산책에 나설 차례. 주차장 귀퉁이 관광안내소 뒤편에서 출발해 가장 꼭대기 무덤까지 돌아오면 약 3㎞, 여유 있게 1시간 30분을 잡으면 된다. 솔숲 사이 완만한 탐방로를 오르면 바로 여러 기의 봉분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른편으로 눈길을 돌리면 왕릉전시관 뒤편 무덤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크고 작은 무덤이 봉긋하게 솟아 있다.
정상 바로 아래에 폭 27m에 이르는 가장 큰 규모의 44호 무덤이 있다. 5세기 말에 만들어진 이 무덤에서 순장 풍습이 발견됐다. 기록에만 남아 있던 순장이 실제 발견된 건 이곳이 처음이다. 40여 명의 순장자와 수많은 부장품으로 볼 때 왕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고령=글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