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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지

2024-09-24 (화) 이근혁 패사디나,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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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숨 쉬며 살아가는 세상은 모두가 성지다. 그런 곳에서도 더 세상을 밝게 만들어준 분들이 살던 곳이 있는데 그런 곳을 찾아서 다니며 그분들의 행적을 더듬어 배우려 노력하는 것이 성지순례며 추모하고 나의 신앙의식과 영적성장을 얻기 위함이 순례의 목적이다.

지금 한국일보가 주관하여 걸어서 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나를 되돌아 보며 수세기동안 순례자가 느끼며 숨 쉬던 공기를 같이 마시며 그들이 걷던 땅 위에 내 발자국도 얹어서 함께 생각하며 되돌아보며 하나가 되어 보는 동참의 좋은 순례의 기회다.

나는 유럽의 성지문화가 대단하고 거룩하게 보인다. 하느님께 목숨을 바친 분들이 누워계신 곳이니 당연하겠지만 웅장한 규모나 아름다움이 내 마음을 압도한다. 세계 최고라는 베드로 대성당은 가기 전부터 커다란 기대가 있었지만 막상 내 눈에는 어느 게 더 크고 웅장한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주위의 모든 성당이 다 굉장했고 다른 개성을 갖고 있었다. 업적을 자랑하고 강대국의 모습을 세계에  과시하려 크고 아름답게 지은 성당의 모습으로 보였다.


몇 군데 성지를 다녀 본 감흥으로 이왕이면 내 나라 성지도 보고 싶어져 한국에서 훌륭한 일을 하다 순교하신 성지를 찾아봤다. 받아들이는 내 마음이 실망스럽다. 성지를 유럽의 웅장하고 거대한 외관으로 비교하면 안 되는데 내 눈에 들어오는 한국의 성지는 너무 가볍고 약해보였다. 의미를 새기고 기억해야 하는데 겉모습만 보인다.

어느 곳이나 조용한 찻집이 주변에 있어서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길 수 있는데 나는 자연을 걷고 호흡하며 느끼는 것이 더 좋았다. 잘 다듬어 놓은 숲 속에 세워진 성인상 하나도 나에게 울림을 주지 못했다. 숨어 지내며 미사를 드리고 선교를 하다 순교하신 외방선교회 신부님에게서도 별다른 느낌을 못 받았다. 그저 못사는 나라, 못 배운 민초에게 평등의식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는 정도 외에는.

황사영의 칙서를 만든 곳은 아주 작은 토굴로 조악하게 만들어놓은 찜질방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나라는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했을 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순교의 땅이라며 엎디어 입맞춤으로 경배를 해서 대단한 나라임을 세상에 알렸다. 선진국이 된지도 오래고 요즈음 문화강국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지만 그런 이 나라 흥망성쇠를 선조들의 순교와는 연결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카톨릭 지에 순교자의 자손들의 행적을 찾아보니 너무나 힘들게 지낸다고 한다. 순교한 선대의 은혜로 이생의 삶에 세속적인 영화를 보장받는다는 것은 물론 있을 수 없지만 가슴 아픈 현실이다.

유럽국가의 많은 곳에 순교자와 성지가 있지만 대한민국은 순교자의 피로 물들었던 신앙의 땅이다. 종교의 입장에서도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성지가 유럽의 그것에 비해서 작고 보잘 것 없이 보이지만 지금의 대한민국 부흥에는 그곳에 묻힌 순교자의 고귀한 정신이 배어있을 게 분명하다.

그분들을 따르며 살려는 마음이 기적을 이루며 이루어놓은 기적 못지않게 중요한 하늘에서 원하는 우리의 삶이다. 우리는 하늘의 뜻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깨어있는 삶이 유지된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곳도 성지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고 우리가 함께 가야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가고 싶다.  

<이근혁 패사디나,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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