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저 낯선 곤충이었다. 날개를 접으면 나무껍질 같고, 펼치면 붉은 나비처럼 날아오를 듯하지만 사실은 툭툭 점프할 뿐이다. 이름도 근사하다. 스파티드 랜턴플라이(Spotted Lanternfly).
중국과 베트남, 인도 등 아시아가 원산지인 이 곤충은 2014년 펜실베이니아 버크스 카운티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석재나 목재, 화물에 붙어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동부 여러 주로 퍼져 포도, 사과, 단풍나무, 호두나무 등 다양한 나무의 수액을 빨아 먹으며 큰 피해를 입히고 있다. 피해가 워낙 심각해지자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조차 “보이면 밟아라”라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스쿨버스 정류장 앞에서 아이들이 곤충을 밟느라 분주한 모습을 볼 때의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어떤 생명이든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래 지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여름, 맞은편 집의 큰 나무가 수많은 랜턴플라이에 덮여 서서히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도 바뀌었다. 랜턴플라이는 나무에 바늘 같은 입을 찔러 넣고 수액을 빨아들였다. 그것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늘까지 이어지는 나무의 숨결 같은 것이었다. 수십, 수백 마리가 동시에 그 맥을 빨아들이자 나무는 힘을 잃고, 떨어지는 감로 때문에 나무 밑은 끈적거렸다. 그 위로 검은 곰팡이가 번지고, 잎은 빛을 잃었으며, 가지는 시들었다. 계절이 바뀌어도 새순은 돋지 않았고, 결국 나무는 죽음을 맞았다.
그제야 내 안에도 ‘해충’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이후 마당에서 랜턴플라이를 발견하면 나는 슬리퍼를 벗어 들었다. 우아하지도,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나무를 지킨다는 명분이 손을 움직였다.
알고 보니 이 곤충은 새들도 잘 먹지 않는단다. 맛이 없는 것인지, 너무 낯선 탓인지 알 수 없다. 자연마저 외면한 곤충을 향해 평범한 생활 도구였던 슬리퍼가 폭력의 도구로 바뀌었고, 그 행위는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슬리퍼로 힘차게 내리치면서도 나는 이 곤충에게서 묘한 연민을 느낀다. 이 땅의 원래 곤충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화물에 실려 온 의도치 않은 여행자, 어쩌면 난민 같은 생명. 세계화와 무역의 부산물로 따라온 존재가 ‘해충’이라는 낙인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의도치 않았으나 이곳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삶, 그리고 때로는 ‘낯선 존재’로 불리는 것. 그것이 어디 랜턴플라이뿐이랴. 슬리퍼를 들고 망설이는 찰나마다,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뿐 아니라 내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되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