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이지만, 지금처럼 직접 담근 김치를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시점이면 꼭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있는데 처음 미국에 도착하고 월마트에서 1달러짜리 컵을 들고 살까 말까를 고민하며 진열대를 서성이던 바로 그때다.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피자나 햄버거는 비싼 돈을 주고라도 사 먹여야 했지만 매운 김치는 어른의 입맛이라 되도록 사 먹지 않고 담가 먹어야 돈을 절약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고 인터넷도 없는 시절이니 그저 내 식으로 김치를 담았다. 아마 몇 번 시도했으나 맛과는 거리가 멀어서였는지 곧 그만두었지 싶다. 마트에서 사 먹다가, 아는 분에게 부탁도 했다가 그럭저럭 한국의 김치와 함께 20년 세월이 훌쩍 흘렀다.
혼자 먹는 혼밥은 죽어라 싫고 김밥처럼 너무 인간적이지 않은 무의미한 맛도 싫고 그렇다고 아이들에게도 주의 주는 인스턴트도 아닌 나름 고상하면서도 몸에는 좋은 건강식이 없나 퇴근길에 마트에 들려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배추가 보였다. 한국은 당연하겠지만 미국에도 김치냉장고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우리 집에도 떡하니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물론 김치 냉장고의 기능은 많은 양의 김치를 담가 숙성시키고 오랫동안 그 맛을 유지 시켜 항상 맛난 김치를 먹는다는 취지였겠지만 우리 집은 채소 저장이나 냉동기능이 전부다. 그저 보관 창고로 전락한 김치 냉장고의 기능을 되살려보자는 순간적인 취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소금물에 배추를 흔들어가며 물을 묻히고 켜켜이 굵은 소금을 뿌렸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10시간에서 12시간을 절였다가 살짝 구부려보고 두꺼운 부분이 구부려지면 다 되었다는 팁을 보고 확인해 보니 너무 구부려지나 싶게 반으로 접혔다.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이제와서 어쩌랴. 두어 번 흔들어 씻으며 소금물을 빼고 물기를 뺐다. 그전에 밀가루 풀을 쑤어야 했다. 푹푹 소리가 나도록 끊이다가 식혀놓았다. 그사이 무채를 썰고 양파와 파를 썰고 커다란 양푼에 고춧가루 두 팩을 넣고 밀가루 풀을 부었고 채 썰어 놓은 무와 양파 그리고 파를 넣고 양념을 시작했다.
양념이 든 양푼 한쪽에 절인 배추를 쌓아놓고 한 개씩 양념을 묻히기 시작했다. 드디어 열두 포기 그러니까 48조각을 다 했다. 가득 찬 김치 큰 통 2개와 작은 통 하나를 쌓아놓고 있으니 얼마나 흐뭇한지 솔직히 맛은 보장 못 하지만 열두 포기를 내 손으로 직접 했다는 생각에 그저 감동적이었다. 몇 달은 딤채에서 맛난 김치를 꺼내면서 아이들에게 ‘바로 이것이 엄마의 김치란다’라며 한껏 어깨를 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사고도 대형사고다. 원래는 6일 정도 숙성을 해야 하는데 한 이틀 정도 지나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드디어 식탁에 김치를 꺼내려 하는데 어라? 김치가 고추장에 푹 절여놓은 것처럼 죽이 되었다. 도무지 김치다운 형태가 아니었다. 온갖 상심의 머릿속 목소리가 들렸다. 친한 친구가 원인을 알아냈는데 고춧가루에는 고운 고춧가루와 굵은 고춧가루가 있단다. 고운 고춧가루로는 고추장을 만들거나 물김치를 담글 때 살짝 색만 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고 김치를 담글 때는 굵은 고춧가룰 사용해야 한단다. 한마디로 나는 고운 고춧가루 즉 고추장을 만드는 고춧가루로 김치를 담갔다는 것이다. 아뿔싸 이럴 수가!
이 나이에 고춧가루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고추장용으로 김치를 담아 배추가 고추장에 절여진 것처럼 김치를 죽처럼 떠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창피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누구는 그런다. 맛이 없으면 김치찌개라도 해서 먹으라고... 그래서 그렇게 해보았지만, 결코 김치찌개의 담백한 맛을 기대하진 못했다. 물론 이웃들과 솔직하게 말하고 나눠서 먹고 끝냈지만 주면서도 나의 어리석음과 실수로 미안함을 얹어 부끄러워하며 김치찌개라도 하라며 퍼주었다. 누구는 “당신, 한국 사람 맞아?"라며 웃는 분도 있었고 나를 조금 생각해서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도 그런 적 있어'라며 위로해 주시는 분도 있었고 “그래도 김치맛은 나네. 다음엔 맛나게 담을 수 있겠는데"라며 웃는 분도 계셨다.
여기가 미국이라 다행한 일이긴 하다. 타국이라는 이점으로 그래도 김치를 담가 먹겠다는 생각 자체에 박수를 주시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서다. 해외에 살면 이상하게도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옛 음식의 그리움으로 사무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뜬금없이 청국장이나 우거짓국이 생각나고 배추를 된장에 지진 된장 배추도 생각나 먹고 싶고 굳이 찬밥에 얹은 보리굴비도 먹고 싶고 비라도 올라치면 바삭한 호박전에 막걸리가 생각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더군다나 김치를 다듬고 난 버릴법한 배추겉잎으로 우거지를 잔뜩 만들어 쟁여 놓고 겨우내 먹고 싶은 마음을 어찌 잠재우겠는가? 당장 다시 배추 한 박스를 사서 이번엔 눈을 부릅뜨고 굵은 고춧가루를 확인한 후 아주아주 만난 김치를 꼭 담그리라. 그래서 남은 배춧잎을 살짝 데쳐 된장에 다시 멸치 몇 마리 넣고 들기름을 듬뿍 넣고 자작하게 지져 고슬고슬한 흰밥에 한술 떠야 되겠다. 이럴 때마다 '난 입맛이 떨어진 적이 없다'고 말 하시던 친정엄마의 숟가락에 담긴 흰쌀밥의 고슬한 풍미가 왜 코끝을 스치는지, 사무치는 그리움이 또 시작되는 한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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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나/엘리콧시티,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