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단계적 비핵화는 30년간 반복된 환상

2026-02-03 (화) 08:13:50 리정호 VA, 전 노동당 39호실 고위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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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2026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제시한 단계적 비핵화 구상은 현실적으로 들린다. 북한의 핵활동 동결을 출발점으로 삼아 군축을 거쳐 궁극적으로 완전한 비핵화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북한이 단기간에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 현실적 접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제안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핵동결부터 시작하자는 아이디어는 미국 내에서도 수차례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왔다. 문제는 북한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가다. 지난 30년간의 경험은 명확한 답을 제공한다. 북한은 국제사회를 속이고, 자원을 얻어내고, 시간을 벌어 핵무기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나는 북한 현지에서 그들의 기만외교를 직접 목격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로 북한은 핵개발 동결을 약속하고 중유와 식량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뒤에서 몰래 우라늄과 플루토늄 농축 프로그램을 가동하며 핵개발을 계속했다.


2000년대 6자 회담은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남북한이 참여한 다자협상이었다. 북한은 협상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끌면서 양보를 얻어냈다. 그리고 2006년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6자 회담 당사국 모두가 북한에 속았다.

2018-2019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하노이 정상회담조차 북한의 기만으로 결렬되었다. 북한은 일부 시설 폐기를 약속하며 전면적 제재 해제를 요구했지만, 실상은 핵심 시설은 숨긴 채 협상하려했다.

만약 북한이 또 다시 단계적 비핵화 합의에 서명한다면, 누가 그것을 검증할 수 있는가? 북한은 언론의 자유가 없는 폐쇄국가다. 수많은 지하 갱도 속에서 핵무기를 계속 증강한다면 이재명 대통령은 어떻게 이를 알 수 있단 말인가?

비핵화 합의든 군축 합의든, 북한이 속이는 것을 누구도 확인할 수 없다. 만약 검증이 가능했다면 미국이 이미 오래 전에 북한을 저지했을 것이다. 검증할 수 없는 약속은 약속이 아니라 기만의 도구다. 북한은 30년 동안 이를 완벽하게 증명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실용적으로 접근하자"고 주장한다. 이상을 포기하지 말되 현실을 인정하고, 단계적으로 문제를 풀어가자는 것이다.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상대방이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할 때만 작동한다.

북한은 합리적 행위자가 아니다. 북한정권은 투명하지 않은 폐쇄체제이며, 남한과의 적대관계 유지가 체제생존에 필수적인 정권이다. 이런 정권과 신뢰에 기반한 단계적 합의를 추진한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정한 실용주의는 북한정권의 본질적 성격과 대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첫째, 북한 정권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김정은에게 핵무기는 협상카드가 아니라 체제 생존의 핵심이다. 평화공존은 그에게 안정이 아니라 위협을 의미한다.
둘째, 장기전을 준비해야한다. 북한 체제의 변화는 협상이 아니라 내부 모순, 정보 유입, 세대 교체에서 올 가능성이 높다. 탈북자 지원, 대북방송, USB를 통한 한류 콘텐츠 유입이 정상회담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최대한의 억지력 확보와 한미동맹 강화가 병행되어야한다.

김정은에게 단계적 비핵화는 단지 시간을 벌고 자원을 얻어내는 또 하나의 기회를 의미할 뿐이다. 지난 30년이 이를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했다. 한반도 외교에서 실용주의와 환상을 가르는 선은 태도가 아니라 구조로 정의된다. 북한 정권의 불변하는 본질-핵무기에 대한 절대적 의존, 기만의 역사-을 인식하는 것은 비관주의가 아니다. 그것이 현실주의다. 그리고 현실주의야 말로 현시점에서 대한민국이 요구받는 것이다.

<리정호 VA, 전 노동당 39호실 고위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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