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한마디 - ‘보이지 않는 손길’

2021-12-31 (금) 채수호/자유기고자
크게 작게
내게서 사표를 받아 든 우체국장은 거짓말 안보태고 의자에서 30센치는 튀어오르며 ‘What? Are you leaving me? You are nothing but a valuable asset! (‘뭐라고요? 당신이 날 떠난다고요? 당신은 참으로 귀중한 자산이오’) 하고 말했지요. 70이 한참 지난 늙은이가 무슨 귀중한 자산이리오마는 헤어지는 섭섭함을 그렇게 표현해주는 그가 고마왔습니다.

올해 환갑인 우체국장은 지난번 우편물 분류작업장에서 사용하는 대형박스를 자르지 말고 재활용하도록 제가 제안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의 손을 들어주었지요.

그 후로 제가 근무하는 본점 우체국과 산하 4개 지점 우체국에서는 박스를 온전히 재활용하게되어 연간 적지않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아칸사스 친척 농장에 가서 일하게 되었다고 하니까 섭섭하지만 잘 되었다며 축하해주었어요. 자기도 좀 더 나이를 먹으면 그러고싶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2년여동안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70중반의 노인이 연방정부 우체국 채용시험을 보고 신입직원으로 들어간 것도 어찌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고 아마도 전무후무하지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들뻘, 손자뻘 되는 다양한 인종의 직원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보다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도 저에게는 좋은 경험이었지요.
절대 다수가 흑인과 히스패닉인 그들과 일하면서 생각보다 그들의 사고방식이 우리 한국인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유일한 동양인이자 한국인인 저에게 ‘오빠 오빠, 형님 형님’ 하며 제가 가르쳐준 한국말로 저를 부르면서 매우 친절하고 살갑게 대해주었지만 몇몇 사람에게는 노골적인 인종차별도 당해야 했습니다.

아무튼 팬데믹이 시작되자마자 우체국에 취업한 것은 저에게는 ‘신의 한수’였습니다. 유치원 숫자놀이같은 단순 반복업무를 하면서 저절로 두뇌훈련이 되어 치매를 예방할 수 있었고 작업장에서 하루 15000보 이상 걸으면서 쉴 새없이 물건을 들어나르고 집어던지고 하다보니 팔다리 운동도 저절로 되었지요.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하며 팬데믹으로 초토화된 세탁소 매출을 꼬박 꼬박 받는 봉급으로 메울 수 있었던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 모두가 보이지 않는 손길로 저를 안전하게 인도해주신 주님의 은총이라 생각합니다.

<채수호/자유기고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