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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종교화되는 정치

2021-06-02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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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사들이 확신의 찬 어조로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음모론을 주장할 때 마다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은 어쩌다 그렇게 잘못된 신념의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일까라는 의문과 안타까움이다. 한 때 ‘경영의 신’으로까지 불리며 찬사와 추앙을 받았던 잭 웰치 전 GE 회장은 9년 전 오바마 재선을 앞두고 실업률이 하락했다는 발표가 나오자 “실업률이 오바마 재선을 위해 조작됐다”는 음모론 주장을 폈다. 트위터에 올린 주장은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러면서 웰치의 주장은 “민주당 지지자들이 오바마를 위해 자신의 실업상태를 숨긴 결과”라는 또 다른 음모론으로 새끼를 쳤다. 그가 이런 황당한 내용의 음모론을 퍼뜨린 것은 오바마에 대한 극도의 증오 때문이었다.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인 웰치는 그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 것이다. 그가 음모론을 제기하자 현역시절 경영실적을 잘 마사지하기로 유명했던 웰치다운 발상이라는 조롱이 뒤따랐다. 이처럼 잘못된 신념과 극단적 감정에 사로잡히면 이성은 마비돼 버린다.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극우 음모론 집단인 ‘큐어넌’ 지지자로서는 처음으로 제도권 정치에 진입한 마저리 테일러 그린 공화당 연방하원의원이 벌이고 있는 증오와 분열의 막말 퍼레이드는 음모론 신봉의 해악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온갖 논란이 계속되자 지난 2월 하원 상임위에서 퇴출됐지만 그린은 이에 아랑곳 않고 오히려 막말의 수위를 높여왔다. 급기야 지난달에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마스크 착용지침을 유대인 대학살에 비교하는 망언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그린의 망언에 공화당 일각에서도 “부끄럽다” “사악하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그녀는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듯 보인다. 지역구에서 개최한 ‘아메리카 퍼스트’ 집회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등장해 민주당을 계속 나치에 비유했다. 집회 참석자들은 그린의 여전한 망언과 선동에 열렬히 호응했다.

그린의 지역구는 조지아 주 제14 연방하원 선거구이다. 이곳과 인근 지역은 전 세계 카펫의 90%를 생산해 ‘세계의 카펫 수도’라 불린다. 보수 색채가 아주 강한 곳이다. 지난 대선에서 75%가 트럼프에 표를 던졌다. 어떻게 그린 같은 극우 인사가 연방의회에 진출할 수 있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린이 트럼프의 ‘대선사기’(big lie) 주장에 가장 앞장서 동조하고 있는 데는 개인적 신념에 더해 정치적 계산까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린의 홀로코스트 망언이 나온 후 CNN은 그녀의 지역구민 20여명을 만나 그들의 생각을 들어봤다. 잘못된 발언이라고 점잖게 지적한 유권자들도 일부 있었지만 “직설적으로 할 말을 했다” “내용에 대한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발언할 권리에 대한 주장에는 동조한다”는 식의, 비록 적극 동조는 아니지만 수용할 수 있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CNN은 “그린은 정치적으로 안전해 보인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그린의 망언 후 그녀에게는 전국에서 후원금이 답지하고 있다. 조직은 오히려 커지고 있으며 다음 선거에서 그 누구도 그린을 꺾지 못할 것이라는 성급한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그린의 지역구 분위기는 잘못된 신념과 무지를 바로 잡는데 진실과 사실이 갈수록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탈진실’ 시대의 비극을 상징해주는 것 같다.

정치는 점차 합리적 판단과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 믿음과 맹신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다. 공화당원들 가운데 큐어넌 음모론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비율은 20% 정도에 불과하다는 지난주 설문조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공화당원 대다수가 주장들의 일부는 믿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사람을 수치로 환산해 보면 3,000만 명이 넘는다. 웬만한 주류종교의 신자수보다 많다.

정치가 종교화될수록 자정과 개선 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상식과 사실은 외면을 받고, 맹신과 편향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선동과 비상식 언행은 오히려 정치적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잘못된 신념에 갇혀있는 정치는 사이비 종교와 다르지 않다. 이것이 그린 같은 악성 정치인들을 뿌리 뽑기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는 이유다.

특정 세력의 깃발만 꽂으면 아무리 막말을 하고 비리를 저질렀어도 당선되는 종교화된 정치지역이 넓을수록 그 나라의 정치수준은 낮아진다. 그래서 유권자 수준이 곧 정치와 정치인의 수준이 되는 것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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