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내 아시안들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가 계속 기승을 부리고 있다. 24일에는 뉴욕 지하철 역에서 한 아시안 남성이 누군가에 등을 떠밀려 선로로 추락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2020년 3월부터 금년 3월까지 1년 동안 미 전국에서 발생한 아시안 증오범죄는 6,600건에 달하며 이 가운데 1,000건 이상이 한인을 대상으로 저질러졌다. LA타임스와 아시안 단체가 공동 실시한 조사에서 물리적 폭력이나 증오범죄 피해를 우려한다고 밝힌 캘리포니아 내 아시안 비율은 무려 73%에 달했다.
이처럼 곳곳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자행되는 아시안 증오범죄는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2,200만 아시안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상황이 더욱 불안해지고 불확실해지자 누군가를 대상으로 분노를 투사하려는 부정적 심리기제가 증오범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도널드 트럼프였다. 그는 반복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를 “중국 바이러스”라 칭하면서 중국에 대한 반감을 부추겼다. 아시안들이 소유한 주택과 비즈니스, 그리고 지하철 역 같은 공공장소에 남겨진 인종차별적 낙서의 내용은 섬뜩하다. 특히 “모든 중국인들을 죽여라” 같은, 중국에 대해 극도의 증오를 드러낸 문구들이 많다 한인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자행하고 체포된 후 “중국인으로 오해했다”고 둘러대는 범죄자들도 적지 않다.
미국사회 속에서 우리는 두 개의 얼개를 통해 형상화된다. 그 하나는 스스로를 인식하는 ‘정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에서 우리를 인식하는 ‘이미지’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중국인들과는 아주 다른 민족이라고 인식하지만 많은 다른 미국인들 눈에는 그냥 아시안들일 뿐이다. 특정 아시아 국가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하게 되면 외모가 비슷한 모든 아시안들은 증오의 대상으로 그냥 뭉뚱그려지게 된다.
사실 미국 내 아시안들을 출신국가별로 들여다보면 한 그룹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교육과 소득수준의 편차가 크다. 그럼에도 미국 내 다른 인종들 눈에 비친 아시안들은 똑같거나 비슷한 존재들일 뿐이다. 중국인 한인 일본인을 굳이 구분하거나 가리려 들지 않는다.
다른 민족, 다른 인종들의 이런 인지적 게으름과 무지에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지 한번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중남미 출신들을 그냥 ‘히스패닉’이라 통칭해 부른다.
히스패닉은 스페인어를 뜻하는 ‘히스파니아’에서 나온 말로, 엄밀하게 말하면 스페인어를 쓰는 백인 혈통을 뜻한다. 스페인어를 쓴다 해도 백인 피가 섞이지 않은 흑인이나 인디오들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보다 정확한 어휘는 ‘라티노’이다.
모든 중남미 출신들을 ‘멕시칸’으로 둔갑시키는 무례와 무지에 비하면 ‘히스패닉’은 그래도 양반이다. 아시안들처럼 라티노들 역시 교육과 경제수준이 다른 다양한 국가 출신으로 구성돼 있다. 그래서 라티노들 사이에는 출신국가에 따라 은근히 서로를 구별하면서 우열을 가리려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는다.
같은 아시안인데도 우리는 다른 아시안 커뮤니티와 자신을 구별하는데 열심이었다. 심지어 배타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무리 차별화하고 구별해도 미국사회에서 아시안들은 한 묶음으로 교묘한 차별과 역차별, 그리고 편견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팬데믹 증오범죄는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코로나19 증오범죄법안이 지난 19일 연방하원을 통과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통과 즉시 법안에 서명했다. 분명 환영해야할 일임에도 뭔가 개운치 않은 것은 무려 62명의 공화당 의원들이 이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시안들을 ‘오리엔탈’이라 부르며 무시하고 차별하던 시절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이는 일부 정치인들의 의식수준은 반 아시안 정서가 미국사회 일각에 여전히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확실하게 일깨워준다.
이처럼 원하든 원치 않던 미국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아시안 아메리칸’이라는 또 하나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팬데믹의 쓰라린 경험을 계기로 이제는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코라시안 아메리칸’(korasian american)으로 정체성의 영역을 더 넓혀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적극적인 연대로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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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