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레이건은 여전히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전직 대통령이다. 그의 남다른 친화력과 소통 능력은 리더의 외골수와 불통에 따른 정치적 위기가 생길 때마다 자주 소환되곤 한다. 하지만 개인적 매력과는 별개로 그가 남긴 어두운 유산은 미국사회에 짙은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
레이건 행정부는 1980년대에 전 세계를 휩쓸고 있던 신자유주의 사조를 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신자유주의는 금융규제 완화와 노동의 유연화 등을 골자로 한다. 레이건은 정부의 역할은 크게 축소시키면서 민간의 재량권은 대폭 늘렸다. 당연히 공공영역 위축과 함께 불평등이 심화됐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이런 불평등을 ‘필요악’ 쯤으로 여겼다. 그러면서 미국의 중산층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중산층’은 미국을 상징하던 단어였다. 그러나 이제는 옛말이 되어 버렸다. 지난 수십 년 사이 중산층은 줄고 빈곤층은 더 많이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는 부자 아니면 가난뱅이만 있다”는 자조까지 나오고 있다. 몇 년 전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이런 사회경제적 실상을 표현한 ‘짓눌린 중간’(squeezed middle)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기도 했다.
경제용어에 ‘지니계수’(Gini coefficient)란 것이 있다. 한 국가의 소득 균형상태를 보여주는 수치다. 0은 완전 평등을 1은 완전 불평등을 의미하는데 2019년 미국의 지니계수는 0.49로 선진국들 가운데 최악이었다.
불평등은 현재 미국이 앓고 있는 가장 심각한 질병이다. 잘못된 정치가 초래한 ‘미국병’이다. 브레이크를 밟지 않은 채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라는 엔진을 달고 폭주해 온 결과이다.
수십 년 동안 경제는 외형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기록했지만 미국인 대다수의 삶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빈곤층의 비율은 더 높아졌다. “경제성장이야말로 최고의 빈곤 퇴치 프로그램”이라는 보수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 현실이 증명해 주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성장과 빈곤 퇴치는 그럴듯한 상관관계가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별 관계가 없다. 성장과 빈곤 사이의 상관성을 조사해온 ‘경제정책연구소’(EPI)에 따르면 만약 경제성장과 빈곤 퇴치가 정말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라면 미국의 빈곤율은 지난 1986년에 0으로 떨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부의 개입과 인위적인 노력 없이 시장의 논리에만 맡겨둬서는 모두가 성장의 실과를 골고루 나눠 갖는 꿈같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신자유주의는 아주 혹독한 방식으로 일깨워 주었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100여 일 동안 시행했거나 제안한 총 6조 달러 규모의 재정 지출안은 연방정부의 역할을 확대해 이런 현실을 바로잡고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한 마디로 정리해 본다면 ‘중산층 살리기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많이 중산층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두터운 중산층의 존재는 경제 뿐 아니라 사회와 정치의 안정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일수록 갈등 해소를 위한 대화와 타협의 공간이 한층 더 넓어진다. 신체의 건강에는 배가 홀쭉한 게 바람직한 체형일지 몰라도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배불뚝이 소득구조가 건강체형이다.
바이든의 계획은 단순히 코로나 팬데믹으로부터 미국을 건져내기 위한 일시적 처방이 아니라, ‘미국병’의 원인을 완전히 제거해 미국사회와 자본주의의 체질 자체를 바꿔놓겠다는 야심찬 구상으로 봐야 한다. 이를 위해 바이든은 수술 칼을 집어 들었다.
‘미국병’은 너무 중증이라 몇 차례 수술만으로 완치가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일단 첫 수술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철저히 보수와 부유층 이익을 대변하는 신문인 ‘월스트릿 저널’ 같은 매체는 “바이든의 계획안은 노동을 해야 보상을 받는다는 오래된 사회계약을 거부한다”며 비난하고 있지만 대중의 여론은 호의적이다. 특히 중저소득층 백인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경우 그것은 경제적 영향을 넘어 정치지형의 변화까지도 의미할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잇달아 내놓고 있는 야심찬 계획들이 루스벨트의 뉴딜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임을 애써 부인하지 않는다. 미국사회의 토대와 가치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은 루스벨트 혁명은 이후 50년 동안 미국에 지속적인 번영을 안겨 주었다. 바이든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돼 루스벨트의 길을 가게 될지 아니면 실패한 집도로 끝나게 될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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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