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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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사치

2021-05-05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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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정계를 떠나 은둔 생활을 하던 62세 무렵에 쓴 책 ‘노년에 관하여’에서 나이 든 삶이 선사해주는 즐거움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책은 카토라는 노인이 젊은이들에게 노년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키케로는 무엇보다도 젊은 시절을 짓눌렀던 경쟁과 의무감이란 굴레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노년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꼽았다. 그는 “욕망과 갈등, 야망과의 전쟁이 끝나고 자기 자신의 자아와 함께 하는 노년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카토의 입을 빌어 “큰일은 육체의 힘이나 기민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사려와 판단력으로 하는 것”이라 말하면서 노년의 삶을 결코 무의미하거나 비생산적인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한국나이로 올 74세인 배우 윤여정이 지난 4월25일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안았다. 반세기 넘게 한눈팔지 않고 성실히 걸어온 연기 인생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아카데미 수상으로 이어지면서 윤여정은 노년에 인생의 최전성기를 맞고 있다.


윤여정의 솔직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수상 소감은 갖가지 화제를 낳았다. 그러면서 평소 그녀가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밝혀왔던 소신과 발언들이 다시금 조명을 받고 있다. 그녀가 60살이 넘으면서 했다는 남다른 작정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윤여정은 “전에는 생계형 배우여서 작품을 고를 수 없었는데, 이젠 좋아하는 사람들 영화에는 돈을 안 줘도 출연한다”며 “마음대로 작품을 고르는 게 나이가 들면서 내가 누릴 수 있게 된 사치”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과거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작품에 노 개런티로 출연하기도 했다.

윤여정에게 아카데미 수상이라는 영광을 안겨준 ‘미나리’ 출연도 이런 소신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미나리’는 출연배우들의 처우와 촬영환경이 열악할 수밖에 없는 독립영화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감독의 진심을 보고 흔쾌히 출연하기로 했다. 원로배우로서의 자신의 위상이나 금전적 이득이 아닌, 사람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마음껏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노년의 사치를 부리고 싶다던 윤여정의 소망은 아카데미 트로피라는 커다란 선물로 돌아왔다. “큰일은 깊은 사려와 판단력으로 하는 것”이라는 키케로의 조언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윤여정은 젊은이들과 소통하면서도 ‘꼰대’ 티를 내지 않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수십 년이나 나이차가 나는 ‘친구들’과 거침없이 교유하기도 한다. 결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왕성히 활동을 해 정점에 설 수 있게 된 데는 세대를 초월해 우정을 쌓아가는 그녀의 열린 마음이 큰 역할을 했다고 추측해 본다. “인생 후반기의 우정은 건강을 증진시키고 수명을 연장시키며 기억을 보존하고 노화를 지연시킨다”고 많은 연구들이 증언하고 있으니 말이다.

프로이드가 말했듯 시간이 한정돼 있다는 사실은 그것을 더욱 소중하게 만든다. 한 언론계 선배는 시간의 한계를 뚜렷이 인식하게 되면서 삶을 단순화 시켰으며 관계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이전보다 한층 더 삶이 만족스러워졌다고 들려준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한국말에 감정을 묘사하는 단어는 400개가 넘는다. 수많은 단어들 가운데 가장 긍정적인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람들이 흔히들 꼽는 표현은 ‘홀가분하다’이다. 홀가분하다는 것은 거추장스럽지 않고 가뿐한 상태라는 말이다. 그런 해방감과 자유는 짜릿한 행복감이나 일시적 쾌락과는 결이 다른 정서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홀가분함을 맛볼 수 있는 시기가 바로 노년이다. 그러니 의무감이나 체면 때문에 혹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거나 맺고 싶지 않은 관계를 지속해 나갈 필요나 이유는 없다. 젊은 시절을 짓눌렀던 생계의 속박과 가족을 위한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는 노년에 좋은 사람, 그리고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겠다는 것을 윤여정의 표현대로 ‘사치’라 한다면 그것은 아주 현명하고 바람직한 사치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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