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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 ‘필리버스터 전쟁’

2021-04-01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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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대통령이 어제 대규모 인프라 투자 플랜을 발표했다. 팬데믹으로 위축된 경제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 투자는 초당적 합의가 그중 가능한 이슈로 꼽혀 왔지만 이번에도 초당적 입법화는 어려워 보인다. 아니, 공화당의 반대는 코비드 경기부양안 때보다 더욱 거셀 것이다.

이번 도로·교량 건설 등 인프라 재건 계획과 이달 말에 발표할 헬스케어·차일드 케어 등 사회적 인프라 강화까지 두 플랜의 경비가 총 4조 달러에 달할 엄청난 규모 자체에 더해 그 재원 조달이 기업과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대표는 이미 “소위 인프라 제안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대규모 증세와 일자리 죽이기 좌파 정책을 숨긴 ‘트로이의 목마’일 것”이라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하원 통과는 무난하겠지만 상원은 먹구름이다. 민주당 지도부는 공화당과의 타협이 결렬될 경우, 코비드 부양안처럼 과반수 지지만으로 통과시킬 수 있는 예산조정 절차에 의지할 전략을 세우고 있으나 이것도 관련법 조항의 ‘수정’이 필요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나마 인프라 투자는 ‘재정’ 이슈여서 예산조정 절차를 통한 입법화 추진이 가능하지만 투표권 확대, 이민개혁, 총기규제를 비롯한 바이든의 다른 우선과제들의 입법화 전망은 현재로선 가능성 제로에 가깝다. 상원의 ‘필리버스터’라는 장벽에 가로 막혀서다.

법안의 최종표결을 막기 위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절차인 필리버스터 남용에 대한 불만이 나온 것은 이미 오래다. 다수당 독주를 막고 소수당 보이스를 허용해 초당적 합의를 이끌어 내게 한다는 장점보다는 너무 자주 다수당의 의지를 방해하는데 이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키려면 60표의 지지가 필요하다. 소수당이 41표만 모으면 거의 모든 법안의 통과를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민주·공화 할 것 없이 소수당일 땐 좋아하고 다수당이 되면 혐오하는 것이 필리버스터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민주당의 숙원 과제들이 연달아 선을 보이고 공화당의 비판과 반대가 이어지면서 입법의 성패를 좌우할 ‘필리버스터 전쟁’이 다시 가열되고 있다.

필리버스터가 바이든과 민주당 어젠다의 최대 장애로 드러나자 상원 대표인 민주당의 척 슈머는 “타협하라, 안 하면 필리버스터를 없애겠다”고 위협했고, 공화당의 매코널은 즉각 필리버스터 폐지는 “상원의 ‘핵겨울’을 초래할 것”이라며 ‘완전 초토화될 상원’을 경고했다.

명색이 다수당인데도 필리버스터가 버티고 있는 한, 50-50 의석 구도에선, 운신의 폭이 좁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는 민주당에겐 그런 경고를 겁낼 여유가 없다.


바이든과 민주당이 불가피한 선택에 직면했다고 LA타임스는 분석한다. “방해의 달인으로 자처해온 매코널이 새 대통령의 우선 과제들을 저지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것인가. 아니면 마침내 필리버스터 폐지의 때가 온 것인가”

필리버스터가 폐지되면 법안들은 51표 찬성으로 통과될 수 있다. 필리버스터 폐지는 단순 과반수 지지로 가능하다. 민주당이 단합하면 폐지시킬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도 장벽이 버티고 있다. 조 맨친과 키어스틴 시네마, 보수지역 출신의 당내 중도파 2명 의원의 완강한 반대다.

당내 한편에선 필리버스터에 대한 부정적 시각 또한 늘어나고 있으나 전면 폐지보다는 개정 통한 변경을 선호한다. 오랜 상원시절 필리버스터 폐지를 반대했던 바이든도 지난주 기자회견에서 개정에 대한 지지를 시사했다.

사실 필리버스터에 대한 규정은 지난 100여 년 동안 계속 변경되어 왔다. 토론종결 정족수를 몇 차례 바꿨는가 하면 오바마 시절엔 고위공직자 인준을 단순과반수로 통과시키는 ‘핵옵션’을 도입하기도 했다. 앞으로 필리버스터 토론종결 표결의 가결 정족수를 현재의 60표 아닌 51표로 낮추는 개정도 완전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당내 반대로 주춤했던 민주당의 필리버스터 폐지 추진이 최근 다시 활력을 얻고 있다. ‘필리버스터 전쟁’의 이슈가 입법절차 규정이라는 딱딱한 기술적 문제에서 투표권 보호와 이민, 최저임금 등 민생 문제로 여론에 어필하면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조지아를 선두로 공화당의 각 주별 투표권 제한 입법화 추진 속출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공화당의 투표권 제한법들은 지난해 미 사상 최고를 기록한 투표자 수, 특히 마이너리티의 투표율을 감소시킬 것이다. 전국적으로 투표권 제한에 제동을 거는 연방법이 필요한 이유다.

3월 초 하원을 통과한 선거개혁법안, ‘국민을 위한 법’이 투표권을 보호하는 바로 그런 연방법이다. 그러나 이 법안은 상원에서 죽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필리버스터 때문이다.

투표권 보호만이 아니다. 필리버스터 때문에 우편투표를 자유롭게 못하고, 최저임금이 올라가지 않고, 기후변화 대처도, 이민개혁도, 드림법안도 다 물 건너 가버릴 것이다…그 두려움이 체감되기 시작하면 필리버스터 폐지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급증하는 순간이 될 수 있다.

공화당의 필리버스터로 인해 민주당의 우선과제들이 줄줄이 유보되면서 상원이 ‘민생법안들의 무덤’이 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면 조 맨친의 철벽 반대도 흔들릴 수 있을지…민주당의 기대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고문>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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