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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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과 ‘유령총’

2021-04-15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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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총’ ‘붉은 깃발법’ ‘권총을 소총처럼’ - 이 세 가지가 지난주 첫 걸음을 내딛은 바이든 대통령의 총기폭력 대처의 키워드다.

인구 100명당 총기가 120정이 넘는, 그렇게 사람보다 총이 많은 나라, 지난 한해 총기폭력으로 1만9,379명이 숨지고 그보다 더 많은 2만4,090명이 총기로 자살한 나라, 그 수많은 국민들이 총기에 목숨을 잃어도 20년 넘게 아무 대책도 마련하지 않는 정치인들의 나라…미국 내의 총기 범람과 이로 인해 계속되는 참사의 반복, 그런데도 최소한의 총기규제 입법조차 못하고 있는 연방의회의 무능에 대한 해답은 아직 아무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바이든의 8일 총기폭력 대처 행정명령 발표는 조지아, 콜로라도, 캘리포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미 전국에 걸쳐 총기난사 사건이 부쩍 늘어나는 와중인데다 타겟이 색달라서 조금은 더 관심을 끌었다.


이른바 유령총(Ghost Guns)의 확산을 억제하고, 각 주의 총기규제를 강화하는 붉은 깃발, 적기법(Red Flag Laws) 제정을 적극 독려하는 한편 권총에 소총 성능을 강화하는 부품 구입에 제한을 가하는 대량살상 방지책을 제시한 것이다.

유령총은 홈메이드 총이다. 개인이 온라인에서 부품 키트를 구입해 집에서 조립해 만든다. 보통 키트의 80%는 이미 조립된 상태여서 최종 20%만 완성하면 된다. 시간도 별로 안 걸리고 가격도 비싸지 않다. 총기 수집 애호가들만이 아니라 거리의 갱들과 백인우월단체에도 인기가 높은 이유는 따로 있다.

보통 총기는 면허 가진 회사에서 제작되어 면허 가진 총포상에서 판매된다. 국내 제조이건 해외 수입이건 이렇게 정상 제작 판매되는 모든 총기엔 고유의 시리얼 넘버가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유령총엔 시리얼 넘버가 없다. 연방 신원조회 없이 부품을 살 수 있으며 부품엔 시리얼 넘버가 없다.

시리얼 넘버는 치안당국이 제조사에서 총포상, 최초 구매자까지 총기를 추적할 때 사용하는 중요한 정보다. 부품은 현행 규정에선 총기로 취급하지 않아 유령총은 추적이 불가능하다.

정보가 없어 추적이 불가능하니 확산상태도 알기 힘들다. 그러나 유령총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는 수사당국의 데이터는 나와 있다.

2019년 산타클라리타 고교에서 2명을 살해한 16세 고교생이 휘두른 45구경 반자동 권총과 지난해 샌디에고 남성이 런던행 비행기에 몰래 들고 타려던 글록19 복제품, 그리고 2017년 북가주의 총격범이 자신의 아내를 비롯한 5명을 사살한 무기가 모두 유령총이었다.


바이든의 이번 행정조치는 키트 속 각 부품에 시리얼 넘버를 표시하고 부품 키트 구매자에 대한 신원조회를 받도록 규정을 강화하고 있다. 유령총 확산을 억제하려는 고삐잡기다.

권총을 소총처럼 쉽게 바꿔 치사율을 높이는데 사용될 수 있는 안정화 보조장치를 등록대상으로 규제하는 이번 또 하나의 행정조치는 최근의 콜로라도 수퍼마켓 난사사건에 대한 직접 대처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치를 부착한 총기가 10명을 살해한 콜로라도 참사의 무기였다.

법원이 위험인물에 대한 총기소지 금지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선별적 총기규제인 적기법 제정을 각 주에 독려하는 바이든은 법무부에 각 주들이 모델로 삼을 수 있는 적기법 초안 작성도 지시했다. 19개주는 이미 적기법을 통과 시켰는데 캘리포니아의 경우 가족과 경찰뿐 아니라 고용주와 직장 동료, 교사도 위험인물에 대한 청원을 할 수 있도록 범위를 확대시켰다.

많은 전문가들은 바이든의 이번 총기폭력 대응 조치가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미국이 안고 있는 거대한 총기문제에 대한 극히 일부분에 관한 대처일 뿐이다. 행정부에 허용된 총기규제 권한 자체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차기 대통령에 의해 쉽게 폐지 될 수 있는 행정명령보다는 영구적 해결책이 시급하다.

총기 안전을 위해선 의회가 움직여야 한다. 현재 상원에선 지난 3월 하원이 통과시킨 두 개의 총기규제 법안이 표결을 기다리고 있다. 총기쇼와 온라인을 포함한 거의 모든 총기거래에 대한 신원조회 전면 확대와 신원조회 기간을 현행 3일에서 10일로 연장하는, 너무 약하다고 할 만큼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이다.

여론의 지지도 강력하다. 퓨리서치 센터 조사에 의하면 공화당 응답자 82%를 포함한 88%가 모든 총기거래에 대한 신원조회 전면 확대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의 척 슈머 상원대표는 부결이 예상되어도 총기규제법 표결 회부를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수없이 추진되었다 수없이 무너진 유사법안들처럼 이번에도 상원 통과에 실패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전미총기협회는 이미 “수정헌법 2조 위협”이라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공화의원들은 신원조회 강화가 총기권한을 야금야금 깎아먹다 “궁극적으로 박탈할 것”이라고 경계한다. 조 맨친 등 중도파 민주의원들도 반대편에 서 있으니 새로운 총기법 전망이 밝을 수가 없다.

총기규제에 첫 걸음을 내딛은 바이든이 유령총 고삐잡기만이라도 성공한다면 다행일 것이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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