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럼프의 ‘새로운 세상’

2019-03-28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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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의 늪’에서 드디어 탈출했다. 뮬러 보고서는 “미국시민이나 트럼프 캠페인 관계자가 러시아와 공모 혹은 조율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다”라는 신중한 표현을 쓰고 있지만 트럼프에겐 넘치도록 충분한 ‘무죄 입증’이었다.

지난 일요일에 공개된 로버트 뮬러 특검수사의 결론은 워싱턴 정가를 뒤흔드는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대통령 탄핵까지 위협하며 공격의 수위를 높였던 민주당은 한순간에 수세에 몰렸고, 출범부터 계속 백악관을 짓눌렀던 먹구름이 걷히면서 트럼프에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뮬러 보고서의 면죄부로 운신의 폭도 넓어졌고 2020년 대선을 앞두고 주요 어젠다에 집중할 시간도 늘어났다. 민주당은 트럼프 조사의 강도를 재고해야 할 것이며 공화당의 반란은 줄어들 것이다. 특히 공화당은 그 어느 때보다 트럼프를 중심으로 단단히 결집할 것이다. 핵심표밭에 대한 장악력이 더욱 강력해질 트럼프에 반기를 들 공화의원은 찾기 힘들어질 것이다. 초당적 합의에 앞장서는 온건파 의원이 줄어들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백악관과 함께 러시아 그늘에 갇혀 지난 2년 방어에 급급했던 공화당도 이젠 트럼프와 의기투합, 뮬러 보고서를 무기삼아 공격태세를 완료한 상태다.

트윗으로 수없이 외쳐댔던 ‘공모 없음’이 사실로 판명된 후 자신감을 되찾은 트럼프는 요즘 승리 행진을 즐기고 있다. 엊그제엔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기립박수 환영을 받으며 의회를 방문해 헬스케어에서 무역, 이민에 이르기까지 공격적 어젠다의 청사진을 제시하며 물러서지 않을 것을 천명했고 러시아 스캔들의 보복 의지도 당당하게 시사했다.

트럼프는 뮬러 보고서로 얻게 된 새 정치자산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다시 분열을 선동하는데 허비할 것인가 - 그 대답을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즉흥적 대통령답게 빠르게 움직이는 트럼프의 ‘새 출발’ 첫 행보가 또 한 번 워싱턴을 뒤흔든 것은 보고서 결론 공개 하루 뒤였다.

뮬러에게 최대한의 신뢰와 존경을 표하고 그의 보호를 트럼프시대의 지상과제로 지켜오면서, 뮬러 보고서가 트럼프정권의 ‘사형집행 영장’이 되기를 고대해온 민주당의 지난 일요일은 글자 그대로 실망과 충격을 넘어 허탈이었을 것이다. 트럼프의 ‘공모 없음’과 함께 사법방해 판단도 유보한 보고서를 공화당 행정부의 당파적 산물로 평가절하 할 입장도 못되었다.

그렇다고 플랜 B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원 상임위들을 통한 트럼프 조사를 확대하는 한편 주요 민생 어젠다를 강력 추진하는 투 트랙 전략이다. 어느 쪽도 쉽지 없다. 특히 조사 확대 전략은 위험부담이 크다. 러시아 스캔들에 피로감을 느끼는 유권자들에겐 뮬러 수사도 끝난 시점에서 자칫 역풍이 될 수 있다. 뮬러 보고서가 뉴스의 중심권을 차지한 상황에서 생뚱맞게 민생 어젠다를 역설하는 것도 어색하다.

순식간에 뮬러 보고서의 암담한 터널에 갇힌 채 출구전략에 고심하던 민주당에게 뜻밖의 선물이 날아들었다. 트럼프의 ‘오바마케어 죽이기’ 선언 - 월요일, 법무부가 오바마케어 소송이 진행 중인 연방항소법원에 오바마케어 전면폐지를 촉구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것이다.

오바마케어를 둘러싼 행정부 내 다툼에서 보건복지장관과 법무장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경파의 손을 들어주며, 행정부의 종전 입장을 180도 바꿔버린 트럼프의 드라마틱한 결정이었다. 민주당에겐 ‘믿을 수 없는 행운’의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당장 뉴스의 조명이 뮬러 보고서에서 오바마케어로 옮겨지기 시작했고, 정치권의 화두는 민주당이 가장 선호하는 민생 어젠다이자 2018년 중간선거의 승리 메시지였던 ‘헬스케어’로 바뀌었다.


새롭게 사기충천한 트럼프가 2020년 재선을 앞두고 자신의 핵심지지층이 열광하는 또 하나 ‘공약’ 이행에 돌입한 것이다. 그는 화요일 상원 공화의원들과의 오찬회동에서 새로운 헬스케어플랜을 요구하며 “공화당은 곧 ‘헬스케어 정당’이 될 것이다…지켜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뮬러 보고서로 한껏 고조되었던 공화의원들에겐 달갑지 않은 이슈다. 이미 지난 10년 가까이 오바마케어 폐지와 대안 마련을 수없이 시도했다 실패한 후여서 난감한 표정들이 역력하다. 민주당 하원이 있는 한 입법화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나 ‘트럼프 당’에 속한 이상 피하기는 힘들 것이다. 대통령의 거침없는 행보가 빚어낼 향후 의회풍경의 한 단면을 예고한다.

역풍 우려에 신중을 기하겠지만 트럼프에 대한 의회조사도 계속될 것이다. 뮬러 보고서로 사안을 종료시키기엔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공모가 없었다면, 왜 트럼프는 제임스 코미를 해고했을까, 왜 그처럼 강하게 끊임없이 뮬러 수사를 비난했을까, 왜 트럼프의 참모들은 줄줄이 러시아 관련 거짓말을 했을까, 왜 트럼프는 대면조사를 받지 않았을까, 왜 트럼프는 푸틴을 그토록 배려했을까, 왜 사법방해 판단은 유보한 것일까…”

플로리다 별장에서 트럼프가 “배심원의 평결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기다렸다는 뮬러의 평결은 “무죄”로 나왔다. 그러나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여전히 떠도는 한 조사는 계속되고 그 최종평결은 유권자의 몫이 될 것이다. 러시아 스캔들을 넘어 헬스케어 대결에서 트럼프의 대통령 자격까지 심판하는 평결이 내려질 2020년 표밭의 열기가 벌써 느껴지는 듯하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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