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강남역 사건 10년… 국가는 여성혐오 또 숨기나요?

2026-05-16 (토) 12:00:00 최은서·문지수·남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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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라서 죽는, 차별받는 사회 깨달음

▶ 15세 소녀가 성평등 외치는 대학생 돼
▶ “여고생 희생 ‘묻지마 살인’ 호명에 아득”

"살해를 당했다고? 여자라서?"

2016년 5월, 중학생 박진선(당시 15세)은 이 해괴한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건은 벌써 며칠째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20대 여성이 죽었다. 서울 서초구의 평범한 술집 건물 1층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범인인 남성은 숨어 있다가 무고한 여성을 살해했다. 피해자보다 앞서 남성 6명이 화장실을 이용했지만 그때까지는 아무 일이 없다가 첫 여성이 들어오자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어른들은 이 사건을 '정신질환자의 일탈 범죄'라거나 '원인 없는 묻지마 범죄'라고 했다. 가해자가 조현병을 앓은 데다 여성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이라는 게 이유였다. 다만 가해자가 "(평소) 여성들에게 피해를 입어 범행을 했다"고 진술한 대목에서 진선은 유독 섬찟함을 느꼈다. 딸만 둘을 둔 진선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는지 애먼 진선에게 "세상이 흉흉하니 조심하라"고 더 단단히 일렀다.


그런데 진선은 어쩐지 이 모든 상황이 담 결린 듯 불편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이런 느낌은 분명 처음 겪는 게 아니었다.

사건 전에도 진선은 여자란 이유만으로 남자 형제·친구와 다른 대우를 받을 때면 불편함을 못 견디곤 했다. 제사 때 맏이인 진선은 음식만 준비하고 정작 본 제사엔 남자인 막내가 참여하는 게 납득이 안 돼 큰아버지에게 항의를 한 적도 있었다. 성당 미사에서 남자는 중학생까지 신부님 보조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여자는 초등학생까지만 가능하단 걸 알았을 때도 참지 않고 따져 물었다.

이 사건에 대한 보도를 볼 때도 진선은 왜인지 비슷한 불쾌감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예민해서 불편함을 느껴온 게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생각했다. '여자라서 죽을 정도로 차별받는 사회였구나.'

이 무렵 진선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편함을 느끼는 또 다른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이 사건을 명백한 여성혐오 범죄로 정의했다. 그제야 평생 홀로 시달렸던 결림이 해소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들의 말을 더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책을 찾아 읽었고, 학교 발표 숙제 주제는 꼭 페미니즘 이슈로 정해 파고들었다. 더 자라서는 성평등 사회를 실현하고 싶단 마음으로 사회·정치 전공을 지망했다.

사건이 벌어진 후 10년이 흐른 2026년, 정치외교학과 4학년 대학생이 된 진선은 '강남역 사건'이라 부르게 된 그 사건을 추모하기 위한 여성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광주에서 20대 남성이 일면식도 없는 여자 고교생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전날 다른 여성 동료를 스토킹·성폭행해 고소당한 뒤 저지른 범행이었으니, 명백한 여성혐오 범죄였다. 그러나 세상은 이 사건을 '묻지마 살인'이라고 불렀다.

강남역 사건 때 느낀 아득한 심정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1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같은 질문을 또 꺼내야 했다. “왜 국가는 또 ‘묻지마 살인’이란 이름으로 여성혐오를 숨기는 거지?”

강남역 사건을 기점으로 여성 폭력 범죄의 본질을 깨달은 여성은 진선뿐이 아니다. 강남역 사건 10주기를 맞아 한국일보와 심층 인터뷰를 한 여성 시민 16명은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여성 폭력 범죄가 여성혐오적 사회 구조 때문에 발생한다는 걸 알게 됐다”고 답했다. 이들 중엔 이전까지 여성폭력 의제를 잘 모르다가 강남역 사건이 이른바 ‘빨간 약’(영화 ‘매트릭스’에서 불편한 진실을 깨닫게 하는 매개체)처럼 영향을 미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최은서·문지수·남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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