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시 시작된 ‘헬스케어 여정’

2017-09-21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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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험한 길을 가야할 미국의 ‘헬스케어 여정’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지난여름 연방상원에서의 오바마케어 폐지법안 무산으로 일단락 된 줄 알았던 헬스케어 개혁을 둘러싼 대결이 9월 들어 재개된 것이다. 하긴 유권자들이 금년 내 의회가 처리하기 원하는 가장 중요한 이슈 1위가 헬스케어다. 9월초 실시된 폴리티코/하버드 여론조사 결과다.

여러 법안이 추진되고 있지만 지난주 수요일 같은 날에 상원에서 공개된 두 법안이 눈길을 끈다. ‘헬스케어’를 바라보는 민주·공화 양당의 대조적인 시각이 확실하게 드러나 있다.

무소속 버니 샌더스가 15명의 민주당 의원들과 공동 제안한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Medicare for All)’는 “국민의 기본의료 서비스는 특혜가 아닌 권리”라는 신념에서 출발한 ‘전국민 건강보험’ - 민주당의 오랜 꿈을 대변한다. 공화당 주도의 현 의회에서는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지만 장기적 비전 실현을 향한 첫 걸음은 될 수 있다. 지지율도 꾸준히 상승세를 보인다.


린지 그레이엄과 빌 캐시디 두 공화의원이 발의한 헬스케어법안은 이미 여러 차례 실패한 오바마케어 폐지가 주목적이다. 많은 의료전문가들이 우려하는 무보험자 양산에 대한 대책이나 연방보조금이 대폭 삭감될 저소득층, 보험료 급등 위기에 처하게 될 기존 병력자에 대한 배려가 보이지 않는다. 10여개 환자권익단체들이 강력 반대하고 있다.

샌더스의 법안은 한 마디로 현재 노인층의 건강보험인 메디케어를 4년에 걸쳐 점차적으로 전국민에게 확대시키는 헬스케어 개혁이다. 오바마케어와 유사한 의료혜택을 받게 되며 가입자의 코페이나 디덕터블 등의 경비부담이 없다. 모든 의료비 지불은 ‘정부’, 하나의 창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싱글-페이어(single-payer)라고도 불린다. 추가 베니핏을 원하면 민간보험사를 통해 더 살 수 있다.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 법안의 컨셉은 상당히 강력하다. 새로운 실험이 아니라 이미 수천만 가입자들에게 인기가 높은, 가장 성공적인 기존 정책을 확대하는 것이다. 1965년 시작된 메디케어도 당시 인기 높은 소셜시큐리티의 확대로 출발했다.

대부분의 선진국도 정부 운영의 싱글-페이어 제도를 택하고 있다. 영국에서 건강보험 민영화가 거론되었을 때 마가렛 대처 총리는 반대 이유를 명료하게 밝혔다. “국가 안보가 달린 국방과 국민 건강이 달린 의료는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민간기업에 맡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헬스케어의 국유화’는 금기어에 속해왔다. 정부주도가 언급될 때마다 “사회주의 음모”라며 빗발치는 공격에 민주당도 번번이 꼬리를 내렸다. 이번 샌더스 안도 마찬가지다. 공화당은 아예 관심도 보이지 않고 민주당 내에서도 전폭적 지지는 받지 못한다.

회의론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어떻게 재원을 마련할 것인지, 증세가 불가피한데 어떻게 여론을 설득할 것인지…7월에 실시한 카이저 여론조사에선 정부주도 전국민 건강보험 선호도가 53%로 나타났다. 그러나 증세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반대가 60%로 증가했다. 보험업계의 반대도 거셀 것이다. 물론 현 공화당 의회에서의 통과는 샌더스도 꿈조차 꾸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장벽은 변화에 대한 불안일지 모른다. 대부분 자신의 직장보험에 만족한다는 현 보험가입자들이 새로운 정부보험으로 바꾸는 것에 쉽게 동의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헬스개혁을 홍보하며 가장 강조한 부분도 “여러분의 기존 보험에는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였다.


‘전국민 건강보험’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민주당의 시각에서 본다면 오바마케어는 ‘가장 보수적인’ 버전이다. 정부주도가 아닌 민간 보험회사에 의존하면서 무보험자를 대폭 구제하는 제도인데도 입법화된 순간부터 공화당의 공격목표가 되어 왔다. 그러나 공화당의 폐지 노력은 실패를 거듭했다. 공화당 천하가 된 후에도 계속 좌절당했다.

그레이엄-캐시디 헬스케어안은 오바마케어 폐지의 사실상 마지막 시도다. 9월30일로 끝나는 금년 회계연도의 예산조정절차로 처리해야 단순 과반수 찬성으로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엄과 캐시디는 상원 내에서 합리적 의원들로 꼽히지만 이번 법안은 과거 어떤 폐지안보다 과격하다. 오바마케어의 핵심을 제거하고 골격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진보해설가 E.J. 디온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바마케어 날려 버리기’다.

무엇을 없애려하는가를 짚어보면 이해가 쉽다 : 보험료 공동부담 보조, 메디케이드 확대, 택스 크레딧 혜택 등이 모두 중단되고 개인 및 고용주의 보험가입 의무화 조항도 없어진다. 오바마케어 시행에 배정되었던 연방지원금을 각 주정부에 ‘블럭 그랜트’ 형식을 통해 목돈으로 배분하여 각 주의 헬스케어 정책에 따라 사용하도록 한다. 캘리포니아 등 오바마케어 시행 주의 기금은 줄어들고 텍사스 등 시행 안하는 주의 기금은 늘어난다. 보험사에 대한 규제도 주마다 달라져 기존 병력자와 노인들의 보험료 급등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난번 폐지안 표결의 재방영처럼 이번에도 오바마케어의 생사는 3명 공화당 상원의원의 표심에 달렸다. 자유주의자 랜드 폴 의원이 이미 반대를 공언했으니 존 매케인·수전 콜린스·리사 머코우스키 세 중도파 중 두 명만 반대하면 요즘 불안과 두려움에 밤잠을 설치는 수천만명은 건강보험을 잃지 않을 것이다. 다음 주 표결 예정이다. 통과 가능성이 적지 않다.

만약 통과된다면…‘헬스케어’는 내년 중간선거의 핫이슈가 될 것이다. 기본 안전망을 빼앗긴 유권자들의 분노와 반발이 투표로 이어진다면, 미국은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 시대에 한 발 더 다가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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