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나팔꽃이 피었다

2016-05-27 (금) 03:06:41 김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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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은 일어나 제일 먼저 한 일이 나팔꽃나무를 보는 것이였다. 커피도 마시기 전에. 나팔꽃나무에 무슨 변호가 없는 지 살펴보는 것. 궁금해서 블라인더를 올리고 보니 나팔꽃이 피었다. 꽃 나무에 꽃이 피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이 꽃은 좀 다르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현관 구석 시멘트 틈새에 어느새 나팔꽃나무가 하트 모양의 잎 하나 달고 있어 깜짝 놀랐다. 퇴근해서 좋은 자리로 옮겨 줘야지 하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밤사이 사납게 불던 바람이 마른 잎들을 구석에 모아 놓아 눈길이 갔고 잊고 있던 나팔꽃을 보게 됐다. 물 샐 틈 없길 바랐던 시멘트 공사였는데, 그 틈이 얼마나 된다고 그 틈에 떨어진 나팔꽃씨가 싹이 나고 자랐다. 매일 드나드는 현관 앞인데도 못 보고, 모르고 있었다. 어느새 싹이 나고 자라 나팔꽃나무가 잎파리 두어 개 달고 꽃 봉오리도 두개 맺혔다. 신기하고 대견했다.

그러고 보니 나팔꽃은 혼자 힘으로 피운 게 아니다. 바람은 마른 나뭇잎이며 흙먼지를 가져다 덮어주고 나팔꽃나무가 자란 그 자리는 지붕 홈통이 있어 안개비가 잦은 날씨에 아침마다 물자국을 만들곤 하는 바로 그 곳이다. 신기하고 고마워 사진을 찍어대는 그 순간에도 햇살은 따스하게 나팔꽃나무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꽃 하나는 내가 없는 사이에 피고 졌는데, 토요일 아침 눈비비고 창을 여니 보랏빛 웃음을 가득 머금고 눈을 맞춘다. 반 뼘이나 될까. 그런데도 꽃을 피우다니! 잠옷 바람으로 쪼그리고 앉아 사진을 찍는데 뜨락 가득한 햇살이 눈부셔 전화기 화면이 안 보인다.

꽃나무도 그러한 데 하물며 사람이랴 싶어졌다. 사람이라면 이럴 수 있을까? 시멘트 틈새를 내어 주고, 안개비를 모아주고, 흙먼지를 날라다 덮어주는 바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쉽지 않을 것 같다. 누울 자리가 아니라고, 택도 없다고, 괜한 수고 말라고 자리도 잡기 전에 볶아대다 떡잎 나오면 어서 여기로 저리로 옮기라고 흔들어 꽃 필 기회나 줄까? 장담할 수 없다. 자신이 없다.

<김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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