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시로 예정된 ‘예술의 향기’ 주관의 강연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 가슴은 연신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건 후배들이 부탁한 강연을 망칠까봐 하는 염려 때문에서 였다. 그러나 그날의 내 강연은, 뜻 밖에도 기립박수 속에 그 막을 내려 주었다. 그 박수소리는 나의 또 다른 밝은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 소리 같았다.
내 강연이 끝나던 날 밤, 나와 예술의 향기 회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나의 이번 통영 방문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나와는 15년이 넘는 교류가 있는, 이 모임의 회원이자 한산신문의 기자인 김영화씨가 그들 모임에서 나의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물어 왔다. 나는 얼떨결에 “고맙다”라고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헤어졌다.
그 다음날 예술의 향기 멤버들과 내가 통영의 밤바다가 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커다란 회관식 식당에서 다시 만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나의 기념관을 빠른 시일 안에 건립하여, 운영하다가 내 사후에 통영시에 넘기겠다는 ‘양해각서’를 미리 마련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간의 양해각서 서명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끝났다.
양해각서 서명이 끝난 후 이 모임의 회장이자, 통영시의회 의원이기도 한, 이지연 회장의 내 기념관 건립에 대한 그의 의욕적인 소신 발표에 이어, 그들의 후의(厚意)에 대한 나의 고마움을 전달하는 답변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그 모임의 부회장이자 통영시의 위촉으로 통영을 빛낸 문화ㆍ예술인에 관한 책자 발간을 맡고 있는, 박우권씨의 나의 기념관 건립에 대한 밝은 전망에 대한 그의 소견을 피력했다.
그가 말한 밝은 전망이란, ‘주 평 선생이 지니고 있는 자료는 다른 분들과는 달리 문학ㆍ연극ㆍ무용ㆍ그리고 동극에 관한 음반과 사진 등,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자료가 많기 때문에 기념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입체적이고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과, 평생을 두고 어린이들의 정서교육과 아동극 개척에 힘써 온 점을 미루어, 초등학교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로 알맞다’는 내용이었다.
박 부회장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내가 지금껏 아동극 외길 60년을 걸어온 게 결과적으로 보람을 찾게 된 것임과 동시에, 외롭지 않은 길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저 아래의 파도 같이 내 가슴에서 나울이 되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다음날, 그러니까 내가 미국으로 되돌아 가기 이틀 전, 나는 예술의 향기 회원의 안내로, 내 고향 통영의 관광 명소의 하나인 케이블 카를 타 보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2007년 개장 이후 4백만명이 다녀갔다는 소문대로, 평일인데도 각 지방의 사투리를 쓰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8인승 케이블 카 박스 44대가, 쉴새 없이 하늘 강을 떠 가고 있었다. 베니치아(베니스)운하를 노저어 가는 콘도라처럼 은하수 바다를 떠가는 듯 한, 하늘 배에서 내려다 본 내 고향 마을과, 조개 껍질을 엎어 놓은 듯한 한려수도의 섬들이, 마치 동화 속의 그림 같이 아름다웠다.
그러면서 만일에 내 기념관이 세워지면, 박우권씨의 말과 같이 수학여행 온 초등학생들이, 오늘의 이 늙은이 같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 녹아 드는 동심을 가슴에 담아 볼 것이라고 생각 했다. 한편으로는 내 기념관에도 들려, 내가 그들을 위해 걸어 온 발자취를 음미(吟味) 할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가슴에 품어 보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갈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오자, 잠 안 오는 밤이 이어졌다. 그건 어떤 불안감에서가 아니라, 기대 이상의 환대와 보람을 안고가는, 설레임과 기쁨에서 오는 잠 못 이룸이었다.
늦은 밤, 나는 바닷쪽 베란다 문을 살며시 열고 밖으로 나갔다. 우연의 일치라고 나 할까, 내가 묵고 있는 ‘한산호텔’은 내가 풋내기 연정에 빠져 둘이서 손잡고 걷던 그 바닷가에 세워져 있었다. 바다 저쪽, 내 중학시절 오카야마무라(일제시대에 일본 오카야마현에서 집단으로 이주해 와 살던 농장 마을)라고 불렀던 그 광산촌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세워진 커다란 조선소의 밤을 밝히는 불빛이 바닷물에 반사되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한산섬 쪽에서 통영 항구로 들어오는, 양 쪽 강 기슭 물여울에 세워진 나지막 한 등대에서는 옛날과 다름 없이, 파랑 빨강 불빛을 교대로 반짝거리며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옛날 이 등대 사이로, 부산에서 온 여객선이 통영항에 손님을 내리고 또 태우고는, 내가 바라 보고 서 있는 이 바다를 지나, 여수로 삼천포로 가는 밤 여객선이 ‘부-웅’ 하고 지나가던 그 뱃고동 소리는 시대 변천에 밀려 이제는 들을 수가 없었다.
한편 낮에 내가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던 길에, 통영 민속박물관에 들렸을 때, 그 민속박물관의 김일룡 관장이 들려준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 에 대한 놀랍고도, 숨겨진 뒷이야기 한토막이 다시 머리 속에 떠 올랐다. 그 숨겨진 이야기란, 공전의 힛트를 친 그 노래의 오리지날이 지난날 내 고향 통영의 가수 김해일씨가 부른 “돌아와요 충무항”(충무는 통영의 옛 이름)이란 사실이다. 그래서 조용필이 통영의 원작자에게 1억5천만원의 로얄티를 배상했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늦은 밤까지 나는 호텔 베란다 난간에 기대서서, 나흘의 체류가 아쉬운 듯 내 고향 5월의 밤 바다를 바라보면서, ‘돌아와요 충무항’의 오리지날 가사 / 꽃피는 미륵산에 / 봄이 왔건만 / 님 떠난 충무항은 / 갈매기만 슬피우네 / (후략) 로, 나지막하게 노래 부르고 서 있었다. 언젠가는 다시 올 그 날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