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윤진ㅣ슬프게 하는 것
2012-06-11 (월) 12:00:00
Safe Way를 갔다가 잊고 지냈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그것을 샀다. 세상을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일 아니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일들이 다시 잊지 말아야 할 다른 일을 만나게 된 때 삶을 점검해 보며 새삼 잊어버렸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특별히 그 누군가에게 내가 그를 꼭 기억하며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면 더더욱 슬픈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서울 아이들은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나 알아야 한다고 난 압구정동 광림교회 뒤의 한 화실에 보내졌다. 그 일로 꼬맹이 아들 둘과 형부와 함께 소박하게 살고 있던 착하디 착한 우리 사촌 언니네서 잠깐 살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으면 화실로 갔다가 저녁이 돼서야 언니네로 가서 애들이랑 놀아줬다.
첫째인 석훈이는 말이 별로 없었다. 말을 시키면 더 멀리 달아났다. 고집도 세고 욕심도 있었다. 가끔은 언니를 힘들게 하는 그 녀석이 미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난 열심히 애써서 석훈이의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하루 종일 누나 오기를 기다리다 누나가 오면 외면하던 석훈이는 내가 좋아할만한 건 다 아껴 두었다가 동생인 석민이를 통해 내게 주곤 했다.
하루는 학원에서 쓰러져 다시 집으로 가게 된 내 얘기를 들었는지 석훈이는 내가 좋아했던 Peanut Butter & Grape Jelly Stripes쨈을 무슨 돈으로 샀나 모르겠지만 내 머리맡에 두고 갔다. 마음이 짠 했다. 그 후 고3인 나는 대학 가느라 정신이 없었고 대학 가서도 바쁘게 지냈다. 석훈이가 13살이 되고 중학교를 갔다던 해에 나는 마지막으로 그 아이를 봤다.
하늘나라 가기 전날 석훈이의 부쩍 커 버린 모습과 아픔의 고통에 시달려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던 그 녀석의 다정한 눈이 오랜 시간 잊고 지내던 그 녀석을 떠올리는 지금에 와서야 왜 이다지도 그리운지… 골수암으로 빨리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가 기억했어야 했던 아니 내가 꼭 기억했어야 했던 그 아이를 잊어야 했을 만큼 내가 뭘 그리 바빴는지… 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이제 우리 둘째가 석훈이 나이가 되었다. 당시의 딱 석훈이 만한 우리 아들을 보고 있자니 이제야 가슴이 찢어지게 아파했을 우리 사촌 언니의 마음이 보인다. 얼마나 아팠을까… 언니의 마음을 지금에서야 조금이라도 짐작해 볼 수 있는데…. 그 땐 잘 위로해 주지도 못했었는데… 그 후에도 조용히 교회를 다니며 사람들에게 다소곳하게 웃음을 보여주던 언니의 성숙함이 내 마음엔 왜 슬픔으로 남는지 모르겠다. 언니는 하늘을 생각하고 다시 만날 그 날을 기쁨으로 기다리나 보다.
나는 먹지도 못할 그 쨈을 사 와서 어릴 적 석훈이를 생각하며 나 홀로 슬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