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윤진 l 오래된 물감

2012-06-04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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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생활에서 작은 이벤트 하나라도 만들려면 스케줄을 바꾸고 시간을 쪼개고 여러 가지 작업을 거치는 수고가 필요하다. 그래서 간만에 무엇을 하나 해 보려다가도 이것 저것 생각하고 재 보다가 그만두고 만다. 하물며 그것이 오랜 시간을 요하는 일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물건을 정리하다 근 15년만에 그림을 시작해보려고 샀었던 캔버스, 물감, 붓…등등 그림 도구를 찾아냈다. Art를 하는 지인과 함께 오클랜드의 한 화방에 가서 한참 그림쟁이로 살 때를 떠올리며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6년이 지나가고 있다.

“욕심도 없고, 독한 구석도 없어서…” 어릴 적 엄마가 늘 내게 하시던 말씀이다. 뒤돌아보면 나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참 바보(?) 같을 때가 많았다. 뭔가 선택해야 했을 땐 제일 안 좋은 걸 집었고, 맨나중 것을 가지기도 했다. 미장이가 아버지였던 내 친구에겐 몰래 친구 팔레트에 내 물감을 짜 놓아 주기도 했고, 식사를 거르던 미술 학원 후배에겐 빵을 사다 주면서도 먹다가 남아서 가져왔다고 하며 부담을 주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새로 산 운동화가 친구 앞에 미안해서 일부러 먼지를 잔뜩 묻혀서 신고 다녔고, 잘 살진 않았지만 온 집안이 첫 손주였던 내게 부족함 없이 해 주셨기에 그것이 그렇지 못했던 내 친구들에겐 왠지 죄의식이 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좋아했던 친구,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 그 친구는 날 이기고 싶어했었다. 누가 이기면 어떠랴… 그게 어린 내겐 큰 충격이었다.

오래된 물감은 내게 아픔으로 다가온다. 지금은 옛 바보(?)처럼 살진 않는다. 내 것 챙길 줄도 알고, 좋은 것 있으면 어떨 땐 먼저 가지기도 한다. 다치지 않으려고 미리 방어진을 친다. 어쩌면 난 내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래된 물감은 내가 다니던 진주의 예로 화실을 생각나게 하고 거기서의 추억을 생각나게 하고 각종 대회 때의 열기를 생각나게 하고 내 사랑하는 친구들을 생각나게 하니 그런 면에서 기쁨이고 고마움이다.

오래된 물감은 내게 다시 시작해 보라고 한다. 친구에 대한 생각도 바보 같았던 옛날의 모습도. 또 지금을 그렇게 살고 있을 누군가에게는 그건 바보 같은 게 아니라 배려이고 사랑하는 마음이고 과장되어지지 않은 순수함이라고 설명하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할 수 있다고 속삭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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