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개척자의 희생

2005-08-30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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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생각

▶ 윤학재/전 워싱턴 한인연합회 이사장

1960년대부터 미국 이민의 물결이 높아졌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이억 만리 워싱턴, 볼티모아, 리치몬드 지역에도 와서 열악한 환경에 생업을 개척하던 한인 이민1세들은 상당수가 권총강도에 의해 희생되었다. 한인 이민사상 가장 가슴아픈 일이다.
1974년부터 2005년 현재까지 워싱턴 지역에서 피살된 한인은 59명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1993년에는 한해에 8명이 사망하는 참극을 겪었다. 하지만 94년부터 98년까지의 통계는 빠진 것이므로 모두 합치면 전체 희생자는 70명 이상에 이를 것으로 본다. 특히 91, 92, 93년 희생자는 무려 23명이나 되었다. 강도에 희생된 피해자는 사망자 뿐 아니라 총이나 칼로, 또는 폭력으로 불구가 되어 평생을 한을 씹으며 살아가는 동포와 가족 또한 슬픔 희생자들이다.
1993년은 우범지대 한인상가들이 긴장과 공포, 그리고 슬픔으로 어두운 나날을 보냈다.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이 모두 강도로 보였다. 12시간 이상의 긴장된 하루가 지나고 가게문을 나서고 집에 돌아올 때야 긴장이 풀리고 하루종일 쌓인 스트레스로 온 몸이 땅속으로 빠져든다. 장사가 아니라 공포의 전쟁, 그것이었다.
언론과 동포사회에서는 우리 한인이 우범지대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했지만, 목숨을 걸고 장사를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이민 개척자들은 시간과 몸으로 싸우는 이 길을 운명적으로 걸어야 했다. 워싱턴 한인회와 안전대책위원회는 흑인단체와 협력하며, 상점 이웃들과 친선을 도모하고, 경찰과 함께 힘을 모아 범죄예방에 노력했다. 그후 95년부터는 강도 희생자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지만 이민자의 개척의 길은 피와 땀과 눈물의 희생을 요구했다.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은 자리에 엄마가 서고, 엄마가 쓰러진 자리를 자식이 지켰다. 이민자의 그 어려운 역경의 세월을 인내와 용기로 버티며 오늘의 동포사회를 건설했다. 그리고 자녀들을 잘 교육시켜 성공한 이민자의 문을 열었다.
한송이 연꽃을 피우기 위해, 이민 보따리 지고 온 노란 흙이 물 속에서 까맣게 썩었다. 이민자의 희생, 이것은 시대적 사명이며 이민자의 역사적 소명이었다. 그리고 내일의 한인세대를 열었다.
이제 우리는 희생된 그들을 생각하고 위로하는 작은 추모비라도 하나 세워서 우리 후손들이 선배들의 눈물자국을 닦아주면서 오늘의 이민 역사를 기억하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윤학재/전 워싱턴 한인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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