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2005-08-25 (목) 12:00:00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현재의 나는 이 말씀에 위안을 받으며 지낸다. 결코 다른 이들의 모습이 아님에 그렇다.
변해진 내 모습을 처음에 바라볼 때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바라보듯 기이함을 느꼈었다. 사람들은 병신이나 추물을 보며 그제들의 슬픔을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의 불행을 멸시와 놀림감의 가장 좋은 대상으로 삼는 잔인성과 비열함을 지니고 지낸다. 그것은 아마도 자기는 여러 사람과 견주어 여일한 모습을 지녔다 하는 만족을 얻음과 동시에 희열이 느껴지는 때문인 듯하다.
나는 상냥한 성격이 아니다. 그런 탓으로 남에게 대하는 태도에 무안함을 겪는 사람이 나 아닌 가족들이다. 그러니까 마치 돌과 같이 지냈다 하면 이해가 쉬울 거다. 무생물체인 양으로 지내는 나도 사람이 사람이다. 불편한 나를 위해 마음을 더 써주면 당연히 그 사람과 친숙해짐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몸으로 열심히 봉사하던 상대방에게 변화가 온다. 특히 내가 여자이니까 이성인 남자에게 생긴다. 무덤덤히 별로 희로애락의 변화가 없던 내가 도움을 받다보니 고마운 마음에서 뻣뻣하던 것이 야들야들해진다. 뭐가 생기면 그 사람과 나누고 걱정을 해주게 된다. 그러면 어느 법칙처럼 일이 풀려난다.
이렇게 되니까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나름대로 결론을 얻는다. 아직 인생의 연륜이 얇은 탓에 정과 이성간의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사람의 정감을 되찾은 기쁨보다는 너무 정이 많아져서 어쩌나 걱정에 놓여 지낸다.
기적을 비는 마음. 이 바램이 요사이의 나의 마음이다. 결국에 보면 도토리 키재기로 그저 그런 사람들이다. 외모만으로 판단하여 나처럼 못나고 천대받고 조롱받고 무능하며 또 놀림받는 사람들의 공통된 바램은 기적을 바란다. 출애굽한 유대인들을 쫓는 애굽 군대를 보면서 모세는 기도했다. 앞에 가로막힌 홍해가 갈라져서 유대인들은 건널 수가 있었다.
그렇듯이 나를 비롯하여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남을 얻는다? 생각 상으론 기쁘고 신날 일이지만 한편으론 김이 푸식 빠진다. 잘나지도 않은 사람들이 외모 상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며 제가 잘난 줄로 착각을 얻을 수 있는데 말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상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너무 외모를 생각할 필요가 없지 않나 한다. 형편이 나쁜 나는 이렇게 외치면서 위로를 얻어둘 때가 많다. 괄호 속에서 지내는 주제에 가끔은 나도 남다른 모습에 눈길이, 신경이 쏠린다.
아무리 내가 지혜로울지라도 그것은 믿을 수가 없는 거다. 왜냐하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임에. 그래서 우리는 눈에 띄는 외모로써 그 사람을 판단한다. 미인대회에서 최고 미인의 지혜가 그 아름다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과연 사람들은 알거나 하는 의문을 갖는다.
하여간 우리 몸에 눈과 귀 등의 외모가 있다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외모가 없는, 내장과 뼈만 있는 몸이란 상상조차 하기 싫으니까.
김부순 <버크,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