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이 오는가봐

2005-08-25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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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상

▶ 김해남 랜햄, MD

하늘은 높아만 가고 오곡이 무르익어 가는 가운데 겨레의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반면에 억지로 외면하는 사람도 있다.
아침 산책 공원길은 지난밤에 내린 찬이슬로 촉촉이 젖어 있으며 풀벌레들은 요란하게 아침의 고요를 깨고 산과 들에는 들국화와 코스모스, 그리고 억새풀들이 제철을 맞아 산들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그 동안 지긋지긋하게 기승을 부리며 끈질겼던 잔서도 어쩔 수 없이 찬이슬에 내려앉아 단풍지는 가을철에 자리를 떠넘겼다.
저녁때가 되면 서강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의 붉은 노을이 이곳 워싱턴 주변의 능선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추석의 한가위 달은 맑은 밤하늘을 대낮 같은 시각으로 밝혀주고 참으로 나무랄 데 없는 계절이라겠지만 한편 실향민들은 섭섭한 마음 그지없다고들 한다.
햇곡식으로 차례상 차리고 조상께 감사드리는 추석절은 한민족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어린 시절 살던 고향을 갈래야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세상이고,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 형제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나그네 인생들, 진정 눈물어린 한의 명절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해마다 이때쯤 되면 의식적으로 달력을 외면하면서 어제가 추석이었나 하며 모른 척 지내는 사람도 있다.
슬픈 한을 달래며 방구석에 처박혀 TV에 나오는 가요무대를 보다가 아나운서의 첫 인사말, “멀리 해외에 계시는 동포 여러분”하고 인사를 하면 눈시울을 붉히기 일쑤고, 게다가 얼굴에 잔주름이 가득한 왕년의 가수가 출연하여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한숨만 늘어”를 부르는 장면이 나올 때면 참았던 눈물이 왈칵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리고는 에잇, 마시자 마시자 하며 양주 한 병 까고는 아무렇게나 쓰러져 고향 가는 꿈속에 홀로 중얼거린다.
어린 나이에 떠난 고향 이제 다 늙어서 돌아 오도다 라고 옛 어른들의 말씀을 들었어도 백발은 고쳐지지 않고 서로서로 얼굴을 몰라보며 어디서 오신 손님이냐고 묻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슴이 터질 것 아닌가. 그럴 것이다. 고향 떠나온 지 반세기 지난 지금 찾아가 본들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 것이며 약산동대 거북바위 아래서 알밤 구워먹던 어깨동부들의 추억을 튀겨봤자 그 누가 맞장구치랴. 아무튼 안타까운 일이지만 더 이상 고향은 존재하지 않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추석 때면 울적해지는 가슴속에 이제는 빛 바랜 사진으로 향수의 사진첩 속에 끼워져 있을 따름,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으련다.
실향민들이여, 머나먼 타향에서 추석달과 별을 바라보며 정한수 떠놓고 실컷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옛 생각을 한가위 달 속에 띄워보는 것이 어떨까요.
김해남 랜햄,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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