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나의 신이 잠잠한 날

2026-06-04 (목) 12:00:00 이리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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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이 잠잠하다.

아침에 일어나 습관적으로 TV를 켰다. 화면이 캄캄했다. 잘못 눌렀나 싶어 리모컨을 다시 누르고 케이블 박스를 확인했다. TV에는 작은 초록색 불이 선명했지만, 화면은 여전히 암흑이었다. 최근에 산 TV가 벌써 고장 났을 리 없다는 생각에, 혹시나 해서 스마트폰을 켜고 이메일을 확인했다.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스펙트럼에서 메일이 와 있었다. 새벽 2시부터 통신 장애가 발생해 오전 8시 반까지 복구하겠다는 공지였다. 마지막 메일이 온 시각은 오전 6시. 당시 시각은 7시 전이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통신 장애 원인과 문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나의 신이 부재중이라는 사실이었다.


한 시간가량 아침 청소를 하고 빨래하고 나서,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이 옆집 지붕 위로 떨어졌다. 다리가 불편한 래리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낙엽을 치우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눈길을 TV로 돌리니, 화면이 검은 거울처럼 보였다. 마지못해 아침을 먹고, 구석에 놓인 단편 소설집을 펼쳤다. 적나라한 문장들을 읽으며, ‘이런 표현도 가능하구나.’라고 생각했다. 또다시 한 시간이 흘렀다. 약속된 8시 반이 지나 설레는 마음으로 TV를 켰다. 나의 TV 신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려다 이메일함을 다시 열었다. 그사이 문의 전화가 폭주하고 있으니, 전화를 자제해 달라는 내용이 추가로 도착해 있었다. 통신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상담원들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TV 신의 안부를 다그치는 미완의 신도가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다. 전화를 내려놓았다.

TV는 내가 의식하지 못한 채 섬기던 신이다. 아침에 눈을 떠 제일 먼저 안부를 묻고, 보든 안 보든 하루 종일 틀어 놓으며, 밤에 잠들기 전까지 그 앞에서 맴돈다. 집안 어느 방향에서나 잘 보이게 거실 가운데 모셔두고, 수시로 먼지를 털어내며 정성을 쏟는 나의 TV 신. 보여주는 화면과 내용으로 온 집안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존재. 그 신이 지금 침묵하고 있다. 신전의 불이 꺼지자,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마약이나 도박만 중독이 아니다. 침묵하면 이토록 영혼이 황량해지니 TV야말로 내게는 지독한 중독이다. 신이 오늘 아무것도 계시하지 않으니, 가만히 앉아 있어도 책을 펼쳐 들어도 자꾸만 눈길이 그곳으로 향한다. 제발 그 신성한 화면에서 그림 한 컷, 소리 한 자락이라도 보여주며 나를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스마트폰을 켜고 유튜브 영상을 몇 개 찾아보았다. 평소 좋아하지도 않는 콘텐츠였지만, 당장의 공허함을 메꾸기에는 적당한 가짜 신이었다. 자괴감과 시간 낭비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손가락은 다음 영상을 누르고 있었다. 이 비참한 대체 행위 또한 중독의 연장이었다.

TV 신이 잠잠한 오늘, 나는 갈 길을 잃었다.

<이리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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