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 미국인들은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부추긴다.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하고, 박수를 보내줄 뿐이다.”
랜들 재럴의 1954년 소설 ‘대학의 풍경들’에 나오는 문구다. 1917년 4월, 블라디미르 레닌은 기차를 타고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에드먼드 윌슨이 1940년에 집필한 사회주의 사상사의 제목이 ‘핀란드역으로’인 이유다. 우울과 자본주의를 전복시키겠다는 젊은 대학 졸업생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노엄 샤이버의 연대기는 차라리 ‘버펄로 엘름우드 애비뉴 스타벅스로’라는 제목이 더 어울렸을 것이다. 그곳에서 도화선이 불붙었고, 결국 그것은… 한 권의 책으로 이어졌다.
샤이버의 ‘반란(Mutiny): 대학 교육을 받은 노동계급의 부상과 봉기’는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현상을 과도하게 흥분된 어조로 묘사한 책이다.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라고 상상하는 새로운 계급의 혁명 이야기다. 그러나 이들의 반란은 19세기 초 산업혁명 시대의 “어두운 사탄의 공장들”과 같은 노동 환경에 대한 저항이 아니다.
‘Mutiny(반란)’라는 단어는 보통 군인이나 선원들이 군 지휘 체계에 반기를 드는 행위를 뜻한다. 그렇다면 샤이버가 말하는 이 작은 레닌들이 봉기를 벌이는 상대는 어떤 위계질서인가? 애플 매장과 스타벅스, 그리고 할리웃 스튜디오다. 이 젊은 남녀들은 결코 노동에 단련된 거친 손의 아들과 딸들이 아니다.
한 애플스토어 직원은 국제기계공노조(IAM)의 조직 담당자를 찾아갔다. 샤이버에 따르면 그 조직 담당자는 “요가 강사 집단을 노조화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한번 생각해보라. 요가 강사들이 바리케이드에서 어떤 깃발을 흔들 수 있을까? “우리의 요구를 들어달라(도대체 요가 강사들의 요구가 무엇인가?) 그렇지 않으면 파업하겠다.” 그리고 그 파업은 누구에게, 어떤 형태의 고통을 안긴다는 말인가?
불만에 찬 스타벅스 직원들은 전미자동차노조(UAW)에 합류했지만 곧 그 노조마저 세상의 모든 불의를 바로잡는 데 지나치게 미온적이라며 비난하게 된다. 샤이버는 현재 UAW가 “약 10만 명의 고등교육 종사자들”을 대표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학원생과 비정년트랙 교수들이다. 그들의 숫자와 불만은 자동차 노동자들보다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노조 결성을 선동하던 많은 스타벅스 직원들은 회사가 LGBTQ 권리 문제에 충분히 헌신하지 않는다며 회사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23년 10월7일 이후에는 하마스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한 조직가는 카를 마르크스 초상화가 새겨진 스웨트셔츠를 입고 있었다. 자신의 정신건강 악화를 “일”과 “노조 조직화의 스트레스” 탓으로 돌리던 한 애플스토어 직원은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150달러짜리 비욘세 콘서트 티켓 두 장을 팔아야 했다고 샤이버는 적고 있다.
샤이버는 또 어떤 직원이 “성과 기반 보너스 제도가 비인간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애플의 평가 시스템에 저항했다”고 전한다. 애플이 그에게 주식을 지급하자 그는 그것을 바로 팔아버렸다. “나는 주식 소유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발달이 멈춘 듯한 청소년들은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심각한 문제가 존재한다. 인공지능이 앞으로 더 많은 초급 일자리를 없애기 전부터 이미, 값비싼 자격증을 손에 쥔(하지만 반드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닌) 젊은 성인들을 위한 노동시장은 포화 상태였다. 민간 부문 노동자의 단 6%만을 대표하는 노조는 이 문제를 완화하는 데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점점 더 많은 졸업생들이 성적 인플레이션이라는 박수갈채에 떠밀려 대학 캠퍼스의 정치적 단일문화 속에서 높은 학점과 낮은 학습 수준, 그리고 남 탓하는 재능만을 안고 사회로 나온다. 그들은 자신들의 좌절과 실망을 자본주의와 시장, 사회, 혹은 무엇이든 다른 것의 탓으로 돌린다. 그들의 거대한 특권 의식에는 평범한 삶의 경험으로부터 자신들은 예외라는 생각마저 포함돼 있다.
소위 ‘대학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유혹의 희생양이 된 이들도 적지 않다. 이것은 정치권에 더 많은 보조금을 뿌릴 명분을 제공했고, 대학 산업에는 등록금을 계속 올릴 기회를 안겨주었다. 대학들은 보조금을 빨아들여 몸집을 불리는 데 사용했다. 그렇게 수백만명의 젊은이들은 시간과 돈 면에서 엄청난 비용이 드는 길로 유인됐다. 높은 보수를 받고 만족감도 큰 기술직의 길에서는 멀어지고, 대신 잃어버린 사회적 지위에 대한 막연한 불만만 품은 채 뒤틀린 성인기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 예견된 결과는 2024년 한 보고서에서 드러났다. 대학 졸업생의 45%가 졸업 후 10년이 지나도 “대학 학위를 요구하지 않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통계의 의미는 불분명하다.
도대체 어떤 직업이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대학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 해리 트루먼은 대학 학위가 없었다. 오늘날 학위를 가진 수많은 바리스타들 가운데 시장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해 경제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아니면 실제로는 대학에서 얻은 특별한 재능 자체가 별로 없는 것은 아닐까?
졸업식 시즌이다.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수많은 대학 졸업생들 위로 울려 퍼진다. 그러나 샤이버가 묘사한 인물들이 전형적이라면, 그들이 이제 시작하는 것은 오랜 실망의 여정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유아적 사고방식 역시 함께 늘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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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F. 윌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