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2025-05-01 (목) 12:00:00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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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예전부터 예약된 여행을 가야 할지 망설일 때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는 남편의 응원은 항상 나를 기쁘게 한다. 혼자 감당하기에 벅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넉넉한 미소는 자꾸 뒤돌아보게 하는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나를 기쁘게 한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공항에 앉아 타야 할 비행기를 기다릴 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 고요에 잠겨 쉼을 얻는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볼일을 봐야 하는 그 시간 전까지 온전히 혼자인 그 순간은 내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선사한다.

갑자기 들이닥쳐 조용한 하루를 무너뜨리는 손자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나를 기쁘게 한다. 그들의 끝없는 요구를 따라다니면서도 환하게 웃는 딸아이 모습이 나를 기쁘게 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할 때, 하던 놀이를 던져두고 달려와 오물오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때, 집안은 폭탄 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어도, 가슴은 물밀듯 밀려오는 행복감으로 벅차 진다. 잘 놀다가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짜증과 울음에 정신이 없을 때, 차분하게 그 상황과 지켜야 할 규율을 가르치는 사위의 목소리는 미리 걱정하는 할미의 마음마저 안도하게 한다.


어머니날에 받은 카드는 언제나 나를 기쁘게 한다. 어느 정도는 인사말임을 알아도 엄마로 인해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다던가,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살아 내 자신들에게 진정한 본을 보여주었다는 칭찬은, 고난을 겪으며 받았던 상처를 말끔히 씻어내며 오히려 보람을 느끼게 한다. 그 고난 속에서 울부짖었던 비명이나 불평을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그런 찬사를 받는 것이 멋쩍으면서도 굽었던 어깨가 저절로 펴지게 된다.

어려운 일을 당한 친구를 만났을 때,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나도 그런 상황에 있었기에 공감하는 마음으로 친구의 손을 잡았을 때, 친구의 눈가에 맺히는 나의 아픔은 어떤 상황에도 함께 하는 친구를 얻었다는 가슴 벅찬 기쁨을 맛보게 한다.

얼굴도 가물가물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오래전에 받은 도움에 감사를 전해올 때, 문득 그 시절의 상황이 떠오르고 그런 고난 속에서도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여유는 어디서 왔을까…

구글에서 우리 식당을 다녀간 사람이 별 다섯 개의 평을 올렸을 때, 일부러 주인을 불러 맛있는 음식을 해 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을 때, 자주 오던 손님이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주로 이사 갔다고 이메일을 보내왔을 때 그 말미에 그가 즐겨 먹던 음식의 비법을 물어올 때, 고된 일상으로 뭉쳐진 어깨의 통증도 잊고 얼굴 가득 행복함이 피어난다.

방 두 칸짜리 작은 집이 아이들의 방문으로 비좁아도 언제나 편한 마음으로 드나드는 아이들의 모습이 나를 기쁘게 한다. 두 딸과 두 사위 그리고 두 손자가 모여 함께 먹고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며, 남편과 나는 서로의 어깨를 다독여준다. 쉽지 않은 이민 생활이었지만 그런대로 잘 살아왔다고 서로를 칭찬해 준다.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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