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왕비 시해와 일본의 압박 속에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은 조선왕조의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이었지만, 국왕이 주권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마지막 정치적 수단이기도 했다. 열강의 힘이 동아시아 질서를 뒤흔들던 그 겨울, 대한제국 13년은 바로 그 절박한 새벽에서 시작되었다.
대한제국은 흔히 ‘망하기 직전의 허세’로 평가돼 왔다. 그러나 정치사적으로 보면, 이 시기는 조선왕조 500년 가운데 국가 체제를 가장 급진적으로 재편하려 했던 시기였다.
《대한제국 선언문(大韓帝國 宣言文)》에서 고종이 국호를 삼한(三韓)의 정통을 이어 ‘대한’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한 것은 단순한 체면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오랜 역사 속에 축적된 주권 질서와 국통의 기억을 근대 국가의 이름으로 다시 불러내려는 정치적 선택이었다.
고조선의 단군 정치체제 속에서 삼한은 지역 소국의 집합이 아니라 국가 운영을 위한 상위 질서로 이해될 수 있다. 일부 고대 전승에서는 단군을 최고 통치자의 칭호로 보고, 이러한 체제가 약 40여 대에 걸쳐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대륙사관의 시각에서 삼한은 단군을 중심으로 중앙 통치와 지역 권한이 분화된 정치 구조를 가리키며, 넓은 공간을 안정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통치 방식으로 기능했다.
이러한 사상의 토대 위에서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빠르게 추진되었다. 도시 개편은 근대화를 일상으로 끌어들였다. 전차 도입을 위한 도로 확장과 전등 점등, 남대문 일대 정비는 시민들의 삶에서 체감된 변화였다.
철도는 더욱 전략적이었다. 경인선·경부선·경의선의 개통은 한반도의 공간 구조를 재편했고, 오늘날 산업과 교통의 축 역시 이 시기에 방향이 결정되었다. 일본이 이를 이후 식민지 통치에 활용했다고 해서, 대한제국의 자주적 개혁 의지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통신과 우편 개혁은 국가의 혈관을 바꾸었다. 우정총국 설치와 전신망 확충으로 정보 흐름이 정비되었고,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근대적 공론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교육 개혁 역시 미래를 향한 투자였다. 소학교 제도 정비와 전문 인재 양성은 지식과 국가 운영 능력을 신분에서 국민 전체로 확장하려는 시도였다. 군제 개편 또한 같은 흐름 위에 있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결론에 이른다. 한국의 근대화가 일본 덕분이었다는 주장은 이미 부정된 식민사관이다. 근대화는 기술과 제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주권과 선택, 그리고 이를 감당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전제될 때 비로소 근대화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은 타율이 아닌 자율의 개혁이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헌법이 밝히듯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주권이 일제의 불법적 점유 속에서 단절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보면, 아시아 고대 문명권과 교류했던 고조선(삼한)과 배달(박달)국의 세계까지?한국사의 흐름은 단절보다 연속의 성격이 뚜렷하다.
이 국통의 긴 흐름 위에서 볼 때, 대한제국 13년은 실패가 아니라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자주적 전환기였다.
짧았으나 스스로 근대를 꿈꾸고 준비했던 가장 뜨거운 시간.
그 13년은 결국 대한민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푸른 불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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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 서북미문인협회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