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술 다시보기] 권력자의 위선

2026-02-06 (금) 12:00:00 신상철 / 고려대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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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등극하던 1804년. 앙투안 장 그로는 ‘자파의 페스트 격리소를 방문한 보나파르트’를 그렸다. 가로 7m가 넘는 거대한 화폭 위에 그려진 이 작품은 나폴레옹의 주문으로 제작됐다. 전장의 화염이 솟구치는 원경과 이슬람 사원을 연상하게 하는 건축물, 그리고 중동 지역의 전통 의상을 입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화면 구성은 매우 이국적이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전달한다. 무엇보다도 화면 중앙에 위치한 나폴레옹의 자세가 예사롭지 않다. 예수의 기적을 재현하려는 듯 그는 맨손으로 병자의 환부를 만지고 있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역사화이지만 표현 방식은 종교화의 성격을 띤 독특한 그림이다.

이 작품 속 장면은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수행할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것이다. 1799년 3월 7일 나폴레옹은 오스만제국의 주요한 거점 항구였던 자파를 점령했다. 전투에서는 큰 성공을 거뒀으나 병사 중 1500명 이상이 흑사병에 감염됐다. 원정군의 수석 군의관 데스제네트 남작은 이들을 사원에 격리하고 흑사병에 의한 감염 사실을 은폐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두 차례에 걸쳐 격리소를 방문했지만 그가 취한 행동은 화가가 구현한 신화적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는 환자들에게 아편을 투여해 안락사시키고자 했고 일부 군의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제 이 방식이 적용됐다.

1799년 10월 이집트 원정에서 실패한 나폴레옹은 은밀히 프랑스로 귀국했다. 그리고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쟁취한 후 그는 황제가 됐다. 화가는 대관식을 앞둔 나폴레옹을 위해 이 사건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창출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흑사병의 희생자들 사이에서 고전 조각처럼 당당히 서 있는 나폴레옹. 그는 이 그림에서 연민과 용기를 지닌 구원자로 탈바꿈해 등장한다. 화가는 빛과 색채를 통해 나폴레옹에게 특별한 아우라를 부여했다. 그의 손길이 닿은 환자들은 밝은 빛 속에서 생기를 되찾고 있으며 화려하게 채색된 동방의 이국적 정서는 역사적 진실을 가리는 장막과 같다.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었기에 초현실적이며 영적인 분위기가 더욱 강조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신상철 / 고려대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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