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메건 매카들 칼럼] 변화하는 경제를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

2026-03-09 (월) 12:00:00 메건 매카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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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으로 혼란이 예상되는 산업부문의 종사자들은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공포와 분노 같은 강력한 감정에 사로잡힐 것이다.

대학교육을 받은 전문직 종사자라면 대체로 지난 수 십년간 경제적 호황을 누렸을 터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오랜 기간 지속되면 당연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엘리트들도 그들이 수십년간 누려온 경제적 번영을 단순한 운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인 양 받아들인다.

물론 이들이 거둔 성과는 탈산업 사회에서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단순한 행운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의 재능을 시장에서 보상받을만한 가치로 꽃피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기계가 그토록 힘들여 일궈낸 것을 한순간에 빼앗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이는 단순히 불쾌한 감정을 넘어 유린을 당한 듯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예의바른 상류층 사람들은 이를 ‘격정적인 감정’이라고 부른다.


이런 감정은 이미 기술혁신이 초래한 혼란을 겪고 있는 언론인들 사이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솔직히 언론계 종사자들은 더 이상의 기술혁신을 원치 않는다. 언론이 여론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이들의 우울한 감정은 전체 국민의 밑바닥 정서로 스며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걱정은 언론인들만 하는게 아니다. 데이터 분석, 소프트웨어 코딩, 혹은 글쓰기가 주된 업무인 사람이라면 인공지능이 언제쯤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아갈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밥줄을 쥐고 있는 상사들이 바로 그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유발된 여과되지 않은 감정은 지난 2월 22일,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회사인 시트리니 리서치가 인공지능으로 인해 경제가 추락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삽시간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고, 논리성이 결여된 소형 리서치 회사의 시나리오에 주식시장이 요동쳤다.

여기서 시트리니의 주장에 내재된 결함을 장황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을 원한다면 폴 크루그먼, 타일러 코웬, 조쉬 바로 등이 쓴 글을 읽어보면 된다. 필자는 미래에 대한 엘리트들의 사적인 불안감 때문에 경제가 파멸의 악순환에 빠져들 것이라는 믿음이 대중 사이에 급속히 퍼지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인공지능이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상황은 소득 감소가 아닌 소득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모든 개인의 경제적 상황이 일률적으로 개선된다는 뜻은 아니다. 대량 생산된 섬유 덕분에 저렴해진 옷값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수공예 방식에 의존하는 방직공과 직조공들에게는 나쁜 소식이었다. 마찬가지로 대량생산되는 읽기 쉬운 글, 매력적인 이미지, 소프트웨어 코드 또는 데이터 분석은 큰 틀에서 볼 때 인류에게는 이롭겠지만 현재 이 직종에서 일하는 생산자들에게는 진정한 손실이 될 것이다.

문제는 현재 혼란에 직면한 사람들이 영향력있는 엘리트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의 개인적인 걱정은 여론을 형성하고, 통제불능 상태가 되면 시장까지 움직인다. 다음에 불길한 예언이 떠돌 때, 혹은 이 칼럼을 포함해 인공지능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이 점을 기억하라: 필자를 비롯해 모두가 사적인 문제를 인류의 문제와 혼동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그 누구도 이 둘을 완전히 분리하지 못한다.

예들 들어보자.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데이터 센터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있다는 기사를 읽어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반발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과연 인공지능을 막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미관상 좋지 않고, 전기세나 수도세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지역개발에 대한 일반적인 반발일까? 작가인 맷 이글레시아스는 후자라고 주장한다.


필자가 보기에도 후자가 설득력을 지닌다.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인들은 인공지능에 경계심을 갖고 있지만 분노하지는 않는 것 같고, 이를 사용해본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낙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에 대한 반발이라는 이야기가 지배적인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들과 그들의 고학력 독자들의 두려움에 가장 직접적으로 와닿는 서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훨씬 더 흥미롭다. “님비족(NIMBYs)은 개발을 싫어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진부하고 식상하다. “사람들은 낮은 전기 요금을 원한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반면 “AI 제왕에 대한 풀뿌리 반란”은 새롭고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기계가 초래한 대공황을 다룬 공상 과학 소설이 복잡한 기술확산 매커니즘에 대한 경제학 논문보다 더 흥미롭게 읽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고 경계론자들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제시하는 전체적인 그림이 완전치는 않더라도 세부적인 내용은 유용할 수 있다. 다만 “내 문제”가 “딩신들의 문제”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진정한 기술 혁명 앞에서 우리의 상상력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도 기억해야 한다: 18세기 장인들이나 그들의 동종 산업체 경쟁자들은 원시적인 방직 공장 운영방식에서 주 5일 근무제, 고속도로, 대중 고등교육의 부흥을 추론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일은 그것이 무엇이건 오늘날 여러분이 읽게 될 어떤 비관적인 예언이나 유토피아적 환상보다 훨씬 더 기이하고 놀라울 것이다.

<메건 매카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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