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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사회에 말을 건 판사들

2026-02-09 (월) 12:00:00 이영태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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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부장판사는 “피고인에게 전할 말이 있거나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 싶을 때 양형 이유를 공들여 쓴다”(‘어떤 양형 이유’)고 했다. 2019년 그는 동반 자살을 시도했다 법정에 선 청년 2명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뒤 따로 준비한 당부의 말을 전했다. “이제까지 삶과 죄에 대한 이야기는 형의 선고로 모두 끝났지만, 이후 이야기는 각자 써내려가야 한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우리가 듣게 됐고, 듣는 사람이 있는 한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고 한다. 대다수 판결문이 마지막 물기까지 꽉 짜낸 메마른 문장인 이유다. 이 법언을 뛰쳐나와 사회에 말을 거는 판사들도 있다. 2010년 오토바이를 훔친 전과 14범 소녀를 안아준 김귀옥 판사(인천지방법원장)도 그렇다. 그는 집단폭행을 당한 뒤 삶이 송두리째 바뀐 소녀에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다’ 등을 외치게 한 뒤 “이 소녀가 다시 바르게 살아갈 유일한 길은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아주는 것”이라며 ‘불처분 결정’을 했다

■ 지난해 88세 나이로 별세한 미국 프랭크 카프리오 판사에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판사’란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주차위반으로 기소된 여성의 딸이 돈이 없어 아침을 굶었다고 하자 “엄마가 벌금 대신 너와 아침을 먹는 게 어떻겠냐”는 훈훈한 판결을 했다. 아픈 아내를 태우고 병원에 가다 받은 교통위반 벌금을 미납한 노인에게는 “이 위반 티켓은 아내를 사랑했다는 증표”라며 벌금을 면제해줬다.

■ 최근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에 체포됐던 에콰도르 출신 5세 아동을 풀어준 프레드 비어리 판사의 판결문이 큰 울림을 줬다. 그는 석방 타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미국 수정헌법은 물론 건국 주역인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그리고 벤저민 프랭클린의 명언들을 하나하나 인용했다. 판결문의 형식도 파괴해 ‘예수께서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는 성경 구절(마태복음 19장 14절)과 함께 마지막 체포 당시 겁에 잔뜩 질린 아이 모습이 담긴 사진을 첨부했다. 사법부 신뢰가 흔들리는 요즘, 법의 존재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영태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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