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을 비롯 재외한인들 중에는 모국어로 시와 수필, 소설을 쓰는 이들이 제법 있다. 자영업자는 손님이 없는 시간이면 국어사전을 뒤적이며 적확한 단어를 찾아 문장을 다듬는다. 풀타임 직장인은 긴 호흡이 필요한 소설보다는 시나 에세이로 스쳐 지나가는 감성을 붙잡아 한편의 작품을 남기기도 한다.
그래도 늘 가슴 한켠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내가 미국에서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망설임, 머뭇거림을 한방에 해결해 주고 모국어로 문학을 하는 한인들의 마음을 도닥거려준 작가가 있다. 바로 ‘혼(魂)불’의 작가 최명희(1947~1998)다.
작품 ‘혼불’은 1930년대 남원의 몰락해가는 종갓집 3대의 이야기로 호남지방 세시풍속, 관혼상제, 노래, 음식들을 우리 언어로 생생히 복원해 낸 풍속의 보고이자 모국어의 보고이다. 혼불을 읽다 보면 한글에 이렇게 풍요롭고 넘치도록 아름다운 말이 있었던가 할 정도다.
최명희 작가는 1995년 10월말 스토니브룩뉴욕주립대 한국학과와 미동부한인문인협회 초청 ‘나의 혼, 나의 문학’ 강연에서 “여러분이 모국어로 글을 쓰는 것은 국경선이 여기까지 확장된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지난 2월초, 작가 최명희가 태어났고 자랐고 묻힌 전주에 당일로 다녀왔다. 서울역에서 오전 7시3분 전주행 KTX를 타고 8시 54분에 전주역에 도착했고 역앞에서 택시를 타고 혼불문학공원에 다다랐다. 연화마을 앞에 하차하여 언덕을 올라 2분 정도 가니 겨울나무가 앙상한 사이로 작가의 묘소가 보였다.
건지산 둘레길 옆이라 사람들이 접근하기 좋은 언덕인데다가 겨울나무 사이로 멀리 아파트와 동네도 보이는 시야가 탁 트인 곳이었다. 묘 왼쪽으로 젊은시절 작가의 단발머리 부조상, 묘 아래 조성된 공원에는 십여 개 반원형 돌에 ‘혼불’에 나오는 문장들이 새겨져 있었다.
꽃을 사가려고 했으나 새벽 6시30분에 문여는 꽃가게가 없었고 전주 기차역에 하나뿐인 편의점에서 스타벅스 모카커피를 사서 봉분 앞 상석에 놓고 참배했다.
최명희 작가와는 개인적 인연이 아주 조금 있다. 연보랏빛 한복을 입고 강연할 때 인터뷰를 했었고 다음해 서울에서 작가와 만나 붐비는 전철을 같이 타고 어느 식당엔가 밥을 먹으러 갔었다. ‘보쌈’을 참으로 맛있게 드시던 기억이 있다.
2년후 병마로 세상을 떠났다니 그분의 참으로 훈훈한 정이 떠올라 인편에 장미꽃 한다발을 묘소에 전해드렸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까마득히 잊었다가 이제서야 묘소에 간 것이다.
다시 택시를 타고 태조 이성계 어진이 있는 경기전과 5분 거리에 있는 최명희 문학관에 들렀다. 이곳에는 최명희 삶의 흔적인 책과 자료들, 지인과 주고받은 편지와 엽서, 다큐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1980년부터 1996년까지 17년간 5부 전 10권이 출간된 ‘혼불’도 유리관 안에 전시되어 있다.
최명희 문학관 뒷길부터 300여 미터의 길 이름이 ‘최명희 길’(집 주소에 최명희 길이라 쓴다)이고 생가터가 지척이다. 화원동(현재 경원동) 생가터 표지석 앞에서 기념사진 찍는 사람들이 있었다.
작가는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혼불이 있다. 혼불이란 정신의 불, 목숨의 불, 감성의 불 또는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하는 정령의 불을 가리키는 말이지요.”라고 말했었다.
전시품 중 드라마 유명 작가인 절친 이금림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다.
“금림아, 소박하게 출발하여 위대하게 거두고 싶다. 나는 소규모의 문제나 삶을 원하지 않는다. 자잘한 염려와 잔잔한 평화로 나의 일생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나는 일평생 영혼의 숙제, 정신의 비밀을 푸는데 나의 힘을 다할 것이다.”
새벽 세 시에 ‘늘 말소리 들리는 곳에 있어 주었으면 싶다’는 친구에게 보낸 171Cm 장문의 편지였다.
작가 나이 29세에 쓴 이 편지는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도 문학이 있어 두렵지 않고 행복하다는 정신을 보여주었다. 향년 51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고향의 품에 안겨 독자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고있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마치 잊었던 숙제를 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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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