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흥진의 영화이야기 - 새 영화 ‘네 눈을 감아라’(Close Your Eyes) ★★★★ (5개 만점)
▶ 기적을 이룰 수도 있다는 ‘영화의 힘’
▶본질을 추구하고 영화에 바치는 헌사
▶과거에의 추억, 기억과 상실·우정 그려
감독 미겔 가라이(왼쪽)와 주연 배우 훌리오 아레나스가 영화 ‘작별의 응시’를 찍고 있다.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정권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아름답고 신비한 영화 ‘벌집의 정령’(The Spirit of the Beehive·1973)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스페인의 노익장 감독 빅터 에리세(83)가 1992년에 만든 ‘빛의 꿈’ 이후 31년 만에 연출한 상영시간 169분짜리의 과거를 찾아 떠나는 여정에 관한 서사 드라마이자 영화의 마력적 힘에 관한 얘기다.
기적을 이룰 수도 있는 영화의 힘과 과거에의 추억 그리고 기억과 상실 및 우정에 관한 드라마로 그 무엇보다도 영화 제작의 본질을 추구하고 또 영화에 바치는 헌사라고 하겠다.
만보하듯이 서서히 진행되는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영화 속으로 빨려들게 되는데 차분하고 상냥하며 또 우수에 깃든 드라마는 마지막 장면에 가서 아찔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그 마지막 장면이 꼭 ‘시네마 천국’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1947년. 프랑스의 외딴 곳에 있는 큰 저택에 한 남자(호세 코로나도)가 찾아온다. 저택의 병약한 노 주인이 남자에게 젊은 여자의 사진을 주면서 샹하이에 가서 오래 전에 헤어진 사진의 주인공인 자기 딸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죽기 전에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이어 장면은 2012년의 마드리드로 전이된다. 서막식으로 나오는 대저택 장면은 미겔 가라이(마놀로 솔로)가 감독하고 그의 친구인 훌리오 아레나스(호세 코로나도)가 주연하는 ‘작별의 응시’(The Farewell Gaze)의 한 장면이다. 그런데 훌리오가 영화 제작 중에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버려 영화 제작이 중단되고 장래가 촉망되던 미겔은 지금은 해안의 오두막에서 번역과 3류 소설을 쓰면서 살고 있다.
어느 날 마드리드의 한 TV 방송국에서 미겔에게 미궁의 사건을 수사하는 프로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이 날아든다. ‘작별의 응시’ 촬영 중 사라진 훌리오의 얘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요청에 응한 미겔이 과거를 파고들면서 영화는 약간 수사 미스터리 식으로 진행된다. 미겔은 훌리오와의 과거를 재점검하는 과정에서 프라도 미술관의 안내원으로 일하는 훌리오의 딸 아나(아나 토렌트-‘벌집의 정령’의 주인공 소녀 역)도 만나고 옛 친구이자 영화 편집자였던 막스 로카(마리오 파르도)를 만나 셀루로이드 필름으로 찍은 미완성의 ‘작별의 응시’도 보면서 과거로 깊이 들어간다.
미겔이 막스에게 묻는다. “영화가 기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라고. 이에 막스가 이렇게 대답한다. “드라이어 이후 영화가 기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드라이어는 심오한 종교적 의미가 담긴 영화를 만든 덴마크의 감독 칼 테오도르 드라이어를 말한다.
미겔은 방송 출연이 끝나자 해변 마을로 돌아온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종결부에 들어간다. 미겔이 기타를 치면서 이웃 남자 둘과 함께 ‘마이 라이플, 마이 포니 앤 미’를 부르는 장면이 과거의 물결을 일으키면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 노래는 존 웨인이 나온 웨스턴 ‘리오 브라보’에서 딘 마틴과 릭키 넬슨의 부른다.
그리고 얼마 있다 방송이 나간 후 훌리오가 한 수녀 수도원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있다는 연락이 온다. 이에 미겔은 수도원을 찾아간다. 미겔의 얘기가 빅터 에리세 감독 자신의 얘기처럼 느껴지는 이 영화는 과거의 창고인 실제 셀루로이드 필름으로 찍은 옛날 영화들의 종말을 탄식하고 있기도 하다.
<
박흥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