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지만 또 한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반대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헤어짐의 슬픔을 남겨주는 것이다. 이렇게 삶은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아쉬움과 벅찬 감정들이 썰물과 밀물처럼 왔다가 갔갔다가 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은 지금 자기가 있는 자기 때와 계속 이어지는 시대, 곧 대를 아는 것이다. 옛날 중국의 공자는 “내가 열다섯 살에는 학문에 뜻을 두었고, 삼십에는 삶의 뜻을 두었고, 사십에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십에는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고, 육십에는 어느 누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 거스르지 않았으며, 나이 칠십에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법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라고 했다.
누가 이렇게 인생을 마치 바둑판처럼 정확하게 선과 공간에 어긋남이 없이 살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는 이렇게 나이의 때와 이어지는 세대에 맞게 살려고 하는 성실한 삶의 자세와 행동을 보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대화 가운데 사람의 행동과 뜻이 다른 것을 표현할 때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라는 말을 주고받는다.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날 때 듣기 좋은 인사가 “어쩌면 몇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라는 말이다. 부정적인 면에서 해석할 때 발전이나 성장이나 어떤 변화가 없는 것으로 오해할 말이지만 그러나 변하지 않고 그때의 그 모습을 계속 유지했다는 말은 썩어지고 더러워진 이 세상에서 인격과 태도가 변질하지 않고 그때의 순수함과 본색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칭찬의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인생을 마감해야 하는 은퇴니, 노후생활이니 같은 단어가 대화 중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아니 벌써 내가 그런 것을 말해야 할 때가 되었는가 하는 신기함과 당황함에 자신을 자꾸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다.
결국 인생은 등장하는 것보다 퇴장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아름다운 순간임을 깨달을 때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성취한 것을 또한 지키는 것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야구 경기를 보면 투수가 잘 던지다가도 상당한 위기가 올 때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가서 지금까지 공을 잘 던졌던 투수에게 “수고했어!”라고 말하고 새로운 투수를 마운드로 불러들인다. 그 장면을 보면 잘 못 던져서 내려가는 투수의 얼굴을 보면 부끄러움과 죄송함과 아쉬움이 가득하여 30m 정도 떨어진 더그아웃으로 가는 모습이 처량하게 보인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을 포기하고 대통령 후보의 자리를 부통령 해리스에게 물려 주었다.
엄청나게 크고 큰 대통령직을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한 가지 분명한 것을 결정했을 것이다. “나의 때”는 여기까지이다. 그리고 나의 때가 지나면 또 다른 사람의 “대”가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누구를 지지하든 간에 관계없이 “나의 때”와 그 후 이어질 “너의 대”를 발견한 칭찬받는 지도자의 결단력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본즉 해 아래에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다음 자리에 있다가 왕을 대신하여 일어난 젊은이와 함께 있고(전도서4:15)
인생은 그리 영광스런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초라한 것도 아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나의 때’를 알고 또 다음의 대(代)를 생각하는 마음만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칭찬받을 것이고, 그 사람이 사는 세상은 작은 세상이 아니라 큰 대(大) 세상이 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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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목사, 워싱턴 동산교회/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