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해 애를 쓸 때 나를 지도해 준 지도교수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대학원에서 6년간 지도를 받았는데. 졸업 후에도 교제는 가깝게 이어졌지만 몇 년 전에 이분이 텍사스로 이사 간 후에는 만나지 못했다. 올 초에 다시 이 지역으로 이사를 오게되어 오랫만의 상면을 설레임으로 기대했으나, 그동안 심히 악화된 건강으로 병원에서의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고, 안티깝게도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고 이별의 슬픔을 맛보게 되었다.
지도교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나이는 나보다 불과 2살 위라, 교수겸 친구같이 가깝게 지냈다. 한식을 좋아해 여러 번 우리 집에 초청해 한식을 대접했고, 교수 부인의 40세 생일에 깜짝 선물로 주려고 짙은 주황색의 콜벳 스포츠 자동차를 우리집 차고에 보관해 둘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한국과 이탈리아는 반도라 그런지 성깔(?)이 비슷해 다투기도 많이 했는데, 그리고는 곧 잊고 같이 낄낄거리기도 한 수 많은 추억이 있다. 그 중 몇 가지만 고인을 추모하며 나누어 본다.
이 분은 아주 어릴때 가족과 같이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이민 1세인 아버지가 영어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한 것을 기억하고 본인에게 영어 공부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다. 이 분의 표현을 빌리면 “네가 아무리 똑똑해도 영어를 어린아이처럼 구사하면 사람들은 너를 어린아이 취급을 한다”고 하며 미국 신문을 구독해 읽기를 강권했는데, 그래서 본인은 아직까지 그렇게 하고 있다. 이분의 지론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훌륭한 과학자도 많고, 또한 훌륭하게 좋은 사람도 많지만, 이 둘을 다 겸비한 사람은 많지 않다며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본인이 이 지도교수의 첫 학생이라 그런지, 혹은 야심이 커서 그런지 나에게 무지무지하게 많은 과제를 주었는데, 하루는 내가 너무 힘들고 화가 나서 “나는 당신의 학생이지 노예가 아니에요”라고 했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분은 꼼꼼한 성격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시약이나 시험도구를 쓰고 나서 제 자리에 도로 놓는 법이 없어 나를 힘들게 했다. 이 분의 연구비가 소진되어 일하던 테크니션을 내 보냈는데, 따라서 내가 학생 겸 테크니션으로 일하게 되었는데도 그 버릇을 고치지 않아서 내가 그에게 “시약이나 실험도구를 사용하면 제발 있던 자리에 놓으시요”라고 했더니, 나에게 하는 말이 “Chan, go to hell (지옥에나 떨어져라)”하기에, 나도 지지 않고 “What do you mean? I am in the hell already(난 이미 지옥에 있소이다)”라고 말해 서로 크게 웃음을 터트린 기억이 새롭다.
지나고 보면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색깔로 채색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카톨릭 배경을 가진 이 분에게 복음을 여러번 제시했으나 끝내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례식은 약 세달전에 찬 비가 내리는 날에 있었는데, 이분이 월남전 참전용사라 그런지 미 군인 세 명이 참석했다. 한 명은 찬 비를 맞으며 묘지에서 트럼펫으로 진혼곡을 불었고, 두 명은 하관 전에 관에 덮었던 성조기를 정성껏 접은 후 한 무릎을 꿇고 미망인에게 전해 주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미국은 역시 참전 용사를 귀하게 대우하는 국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1978년부터 시작된 우리의 46년간의 긴 인연, 이 오랜 세월 동안 교제를 이어 온 것을 지도 교수와 나는 늘 고맙고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다.
나의 지도 교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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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효 약물학 박사,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