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가끔 소셜 시큐리티 웹사이트의 내 계정에 들어가 은퇴하면 연금이 어느 정도 되는지 확인해 보곤 했다. 만 62세 때부터 조기 수령이 가능한데,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주위에서 은퇴를 준비하는 지인들과 수령의 적정 시점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곤 했다. 그러나 각자 처해진 상황과 계획에 따라 수령 시점을 달리하는 것 같았다. 나도 그 시점을 확실하게 판단하지 못한 상황이지만, 70세부터는 무조건 수령해야 하기에 그냥 가끔 웹사이트에 들어가 본다.
그런데 최근에 내 계정에 적혀 있는 과거 소셜 시큐리티 세금 지급 기록을 살펴보면서 잊고 있었던 옛 일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파트타임으로 일해서 받았던 임금 기록을 보았기 때문이다. 1975년부터의 3년간 기록에 각각 $683, $96, 그리고 $485이 적혀있었다. 내가 1974년에 미국에 와 10학년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해 1977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고등학교 3년 동안 일해 벌은 수입 기록인 셈이다.
내가 미국에서 맨 처음 일하게 된 것은 우연이라면 우연이었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민 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 한 1주일 정도였는데 내가 살던 지역에 있던 한 병원에서였다. 그러나 요즘과 달리 당시 내가 살던 버지니아 주 지역에 사는 한인들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 병원에 한국어로 통역해 줄 사람이 없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의 영어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러나 의학 전문 용어에 무지한 나로서는 통역이 꽤 버거웠다. 그래서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들이나 돌보는 간호원들 모두 꽤 답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병원의 부병원장이라고 하는 분이 병실로 찾아왔다. 중년 나이로 보였는데, 한국어를 좀 하셨다. 반가웠다. 하와이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내가 듣기에는 좀 어색했지만 그래도 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나한테 자신을 설명하면서 혹시 ‘김신’을 아느냐고 물어왔다. 그 이름으로 내가 짐작해 볼 수 있는 사람은 단지 한 명이었는데, 나의 짐작이 맞아떨어졌다.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 중 교통부 장관을 했던 김신이 있었는데, 그가 이 부병원장과 6촌 관계인가 그랬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분이 사용하시던 어휘 중 옛말이 제법 포함되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중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어떤 시간을 가리킬 때 시(時) 대신 점(點)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즉 ‘한 시 반’을 ‘한 점 반’이라고 했다. 미국 오기 전 학교에서 책으로만 배웠던 옛말을 태평양 건너 이국 땅에서 듣는다는 게 신기했다.
그런데 이 부병원장이 보기에 우리 집 사정이 꽤 딱했던 것 같다. 사실 그럴 것이, 미국에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어 가족 모두 영어도 잘 못 하고 아버지는 블루칼라 일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지라 나에게 혹시 일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 집 사정이 내가 꼭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냥 그러겠다고 대답해 버렸다.
그렇게 부병원장의 ‘빽’으로 얻은 미국에서의 첫 일은 청소일이었다. 주말인 토요일과 일요일에 하루에 8시간씩 16시간을 병원 청소하는 일을 했다. 당시 거의 최저 시급인 $2 정도를 받았으니 $683을 벌은 첫 해인 1975년에는 5달 정도 일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해를 넘겨 1976년에는 3주 정도 계속 일하다 그만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1977년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봄에는 대학 진학 바로 전 여름의 한국 방문에 필요한 용돈을 벌려고 잡화상에서 캐셔로 몇 달 또 일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일 경험을 되돌이켜 보며 내 두 아들이 고등학교 다니던 때에 일해 보는 것을 권유했고 두 애들 모두 10학년 마친 후의 여름방학에는 일을 했다. 애들에게는 힘들기도 했지만 좋은 경험이 된 것 같다. 지금도 주위 학생들에게 이다음에 다시 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하찮다고 생각될 수 있는 일들이라도 할 수 있을 때 꼭 해 보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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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룡 변호사, VA 페어팩스카운티 교육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