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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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표 한 장

2024-06-02 (일) 문성길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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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수(午睡)를 즐기던 도중 꿈을 꾸었다.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여행사에서 신신당부를 해줬음에도 깜빡하고 여권 지참을 하지 않고 출발을 한 것이다.

긴 여행 끝에 막상 구경하려던 곳에 여권 제시를 못해 결국 여행의 큰 일정 중 하나를 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서 난감해 하는 도중 낮잠을 깨어버렸다. 개꿈이겠지만 ㅎㅎ.
여권도 비행기 표라든가, 무슨 공연 입장권이라든가, 아니면 무슨 기차표라든가와 유사한, 한 표(票)라고 가정을 하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겠다. 좀 억지인 것 같지만 이야기를 풀어 놓으려면 어쩔 수 없는 궁여지책임에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이미 반세기가 훌쩍 가버린 옛날 일이나 필자 바로 막내아우가 도미(渡美)하려고 김포공항엘 나갔는데 여권 지참을 깜빡 했던 모양이다. 그 당시(1970-73년) 필자는 육군 0관구 사령부 의무실 군의관으로 있을 때라 동생의 다급한 전화 연락을 받고 헌병대 백차를 빌려 탔다(지금으로 치면 관용, 군용차 사적 사용이라 난리 났을 테지만). 서울의 강북쪽 끝에 살던 집이라 사이렌만 불지 않았을 뿐 헤드라이트를 켜고 과속(?)으로 달려가 그 귀중한 여권을 가슴에 품고 김포공항 도착, 동생을 가까스로 비행기 탑승할 수 있게 해주었던 일이 불현듯 생각난다. 물론 그 때 동생은 마지막 비행기 탑승자로 기록됐다.
그랬던 아우가 10여 년 전, 뭐 그리 급한지 차표도 필요 없을 저 세상으로의 편도 여행을 훌쩍 가버림은 무슨 조화인고!


그야말로 엄격한 차표 검사라도 실시하면, 표 준비 안 되었다고 핑계거리를 둘러대고 저 세상으로의 여행선에 탑승을 못하고 이 세상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야속하게도 이럴 땐 우리가 바라는 정반대 현상은 일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진정 인간만사의 조화인가?

탑승인원이 부족해서였나, 무료탑승이라지만 저세상 도착하면 성과급이라도 지급받는 것인가? 무정하게도 이 세상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승선시켜 저 세상으로 데려가려는 경향이 있음을 느끼며 요즈음 여기저기에서 지뢰밭 터지듯 동료, 친지들이 사라져 버림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리고 젊었을 땐 가진 건 없었으나 희망찬 내일을 꿈꾸며 기고만장했었지만 어느덧 노쇠하게 된 작금엔 마치 시들어가는 꽃모양처럼 한껏 풀이 죽은 것 같아 나 자신이 싫다.
간혹 전화로 통화시 상대방 젊은이가 어르신 목소리 활기차시고 젊으신 것 같아요 한다. 듣는 순간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것 같고, 실제 에너지가 팍팍 난다. 이 또한 늙음의 한 단면이겠지만.

50여 년 전 도미한 고교 친구가 버지니아 남쪽 항구도시 노폭(Norfolk)의 어느 대학교로 석사공부를 하러가는 도중 버지니아주 스프링필드에 살던 필자를 방문해 일박하고 떠났다. 그가 병든 몸으로 그동안 살던 이곳 미국을 떠나 부인과 함께 영구 귀국, 날짜가 이달 말이라니 며칠 남지 않았음이라. 필자는 서부에, 그는 동부에 이제는 모국 방문 시나 또 다른 세상에서나 다시 만나게 될 것 같구나.

요사이는 성당 미사 참례시 우리 또래(望九의 연령대) 교우들 한껏 멋들을 부림이 눈에 띄는데 한결 같이 매일 매일이 감사하며 그 누군들 알까마나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기에 모든 걸 최선, 최고의 의상을 하고 나온다고 한다. 백번 이해와 동감한다. 사지 멀쩡하고 잘 움직일 수 있을 때 좋아하는 것들을(산책, 하이킹, 골프 등등) 마음껏 하고, 하고 싶은 일들 더 이상 늦추지 말고 그때그때 시행할 것이로다. 더 이상 후회는 금물이로다! 아니 그렇소이까?
그중 중요하고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와의 관계가 불편한 사이였다면“ 매듭을 풀어라, 화해하라, 이해하고 용서하라!”가 아닐까. 저 세상 승선료가 아주 비싸 구입할 수 없는 경우가 참 좋을 텐데….

<문성길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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