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수도사의 눈물

2024-03-28 (목) 대니얼 김 사랑의 등불 대표,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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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종교 개혁가인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인 마르틴 루터(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부패의 정점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았다. 부패의 정점은 ‘면죄부의 판매였다. 도미니크 교회의 수사인 테첼이 대량의 면죄부를 교인들에게 팔았다. 이에 격분한 마르틴 루터가 부패한 교황청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철면피한 면죄부 판매는 회개 없는 거짓 평안(에레미아 예언자의 가르침을 인용함)이다. 루터는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는 ‘이신칭의‘를 주장하고, 칭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한 구원을 강조했으며,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외쳤다.
루터는 1517년 95개의 논제를 교황청에 제출했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에게 루터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루터는 오직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고 성서에 반하는 잘못된 가르침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교황은 루터를 파문에 처했다. 루터는 파문을 전혀 상관치 않았고,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 정문에 95개의 논제를 게시해 버렸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불꽃처럼 타올라 온 유럽의 사회와 교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마르틴 루터는 수도원 시절 매우 겸손한 수도사였다. 루터는 자신의 힘으로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루터는 복음주의자로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했고, 자신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 교수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의 담대한 종교개혁으로 그가 행했던 공의로운 일들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개신교가 태동했고, 영국에서는 개신교를 바탕으로 하는 대영제국의 교회인 성공회가 발촉되었다.

수도원의 수도사와 신학 교수 시절의 루터는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어떻게 참되고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깊이 고뇌를 했었다. 그의 신앙적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서, 시편, 갈라디아서 강의를 통해 의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확립하게 되었다. 칭의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이 의인임으로 인정 받는다라는 교리를 강조했다.

마르틴 루터의 위대한 업적은 개신교를 태동시키고, 부패에 얼룩진 가톨릭 교회를 회계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교회를 본받아 새로운 가톨릭 교회로 거듭 나게 한 것이었다.
50여 년이 훌쩍 넘은 옛날 이야기이다. 해마다 부활절을 맞으면, 한국의 강원도의 산골에 있는 가톨릭 수도원에서 수도하던 60대의 k 신부를 생각한다.

수도원에서 k 신부는 말없이 새벽부터 저녁 잠들 때까지 수도원의 밭에서 곡식과 야채, 과일나무를 기르며 즐겁게 노동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영적인 교류를 통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에 수도원 생활 8년 째가 되었을 때 K신부가 기도하는 중에 자신만의 행복한 이 순간들이 세속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빈자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K 신부는 하나님께 이 수도원 밖의 세속으로 돌아가 병들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빈자들을 돌보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간구를 드렸다. 어느 날 새벽 녘에 꿈속에서 “네가 가서 하려무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새벽 기도를 마친 후 수도원장에게 신상면담을 요청했다.

원장 신부는 K 신부와 마주 앉아서 그에게 물었다. “무슨 중대한 일이 있는지요?” K 신부는 대답대신 흐느끼며 울었다. 정적의 시간이 흐른 후에 “원장님, 저를 세속으로 보내주세요.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을 받은 수도사로서의 신앙 생활이 행복했습니다. 그렇지만 세속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빈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원장 신부는 물끄럼이 K 신부를 응시한 후 “세상에 나가 빈자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사랑의 등불이 되세요.”

서울교구로 돌아온 K 신부는 교회에서 운용하는 빈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급식소에서 일하고, 일이 끝나면 서울 역사 안의 바닥에서 돗자리를 깔고 지내고 있는 노숙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때로는 함께 잠을 자기도 하면서 병자에게는 교회의 병원에 부탁하여 무료진료를 받게 해주며 빈자의 고충을 해결해 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며 82세로 선종하기 직전까지 빈자들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았다.

나는 K 신부가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때, 그의 눈물이 나의 마음 심연으로 흘러 들어 왔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K 신부처럼 빈자를 구제하며 이타의 삶을 살아갈 것을 마음속에 다짐한다.

<대니얼 김 사랑의 등불 대표,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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