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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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삶의 여정(旅情)

2024-03-18 (월) 최수잔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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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오부터 잔잔한 비가 쉴새없이 내리고 있다. 뒷뜰 숲속아래로 흐르는 물소리에 저 만치 계곡 얼음밑을 떠돌던 물도 화답하며 하늘높이 솟은 마른 나무뿌리를 적시고 어루만져 가지에선 새 순이 금방 터져나올 것만 같다.

알싸한 바람은 아직도 선명하게 눈썹위를 미끄럼치듯 지나가는데 때를 아는 겨울은 몸부림치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삶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건 매일매일 일어나는 작은 일 때문이다. 봄눈처럼 봉오리가 돋고 다 죽은 것같은 고목에도 꽃이 피어나는 건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다. 사랑이다. 생각해보면 마음의 상처를 치유시킨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몰아치는 눈폭풍에서도 봄의 희망을 갖게되는 건 ‘희망은 어둠에서도 손을 잡아주는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봄처럼 파릇한 사랑이 싹트던 나의 어린시절에는 비밀스런 마음이 편지로 전해졌다. 상대를 생각하며 밤새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줄쳐진 하얀 종이에 한자한자 정성들여 쓰고 곱게 접어 봉투에 넣고나면 멀리서 여명의 어슴프레한 빛이 퍼지며 날이 밝았다.
행여 좋아하는 사람의 편지가 오는 날은 혹시 누가 볼까봐 숨어서 가슴 두근거리며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던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던 시절이었다. 요즈음이야 스마트폰으로 손가락 한 번 타치하면 쉽게 전할 수 있는 시대지만 그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가슴 한편에 남아 나를 미소짓게 한다. 가난하고 불편했지만 낭만이 있고 행복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대학졸업 후 미국 오기까지 일한 직장생활에서 느낀 동료간의 사랑은 세월이 저만큼 흘렀어도 아련한 그리움을 준다.

동료의 일이 퇴근시간에 못끝나면 함께 도와서 일하고 가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을 때라도 사무실에 남아 시간을 보내주기도 했다. 상사가 회식을 요청하면 술을 곁들인 모임으로 피로를 풀고 서로를 달래며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일이 바쁜 시기엔 휴가도 포기하고 ‘우리'라는 울타리안에서 열심히 일했고 아프고 어려운 동료가 생기면 시간과 물질을 할애하고 돌보며 동지애에 젖었던 시간이었다.
그런 소중함이 있었기에 마음과 마음이 이어갔다. 지금은 많이 변했겠지만 ‘우리'라는 개념으로 공동의식을 갖고 힘든 일을 함께 나누던 우리의 끈끈한 정, 사랑이 그립고 아쉽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등산하는 것 같아서 오르면 오를수록 숨이 차지만 주변의 경치는 점점 더 아름다워진다. 언젠가 우리는 그 경치를 감상하다 고요하고 깔끔하게 인생을 정리해야 할 시점을 맞게 된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 끝이 있으며 매일 하루와 이별하며 산다는 것이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무한한 성장이 아니라 끝없는 성숙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건지 인생에서 진정으로 승리하는게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갚고 은혜를 베푼 것은 보답을 바라지 말며 소유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된다. 나이가 들수록 소유는 즐기기 보다 베풀기 위해 주어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랑과 연민으로 사람을 돌보는 일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분이 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다. 대통령으로 퇴임하면 세상 어디서도 풍요롭게 살 수 있고 연설 한번으로 상당한 기본적 연설료가 생기지만 그는 백악관 경험으로 돈을 벌거나 부자가 되고 싶은 야망이 없었기에 소박한 조지아 옛집으로 돌아가 검소하고 욕심없는 생활을 했다.


겉치례와 탐욕에 흔들리지 않았고 심각한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살려달라는 기도가 아닌 ‘죽음을 맞는 바른 태도’를 갖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해비탯 (HABITAT)에 참여하여 집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일류 평화와 공중보건을 개선하는 일에 사랑을 가지고 앞장서서 성실함, 정직성, 겸손함등으로 신뢰감을 얻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하나님 사랑을 전한 위대하고 성숙한 신앙인이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열며 하루를 주심에 감사하고, 한 잔의 커피향에 마음이 밝아온다.
어느새 앞뜰에는 은방울꽃이 활짝 피었다. 은방울에 사랑이 방울방울 달렸다. 봄이 오고 있다.

<최수잔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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