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6일,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동문회가 이승만을 기리기 위해 기부금을 냈다는 연합뉴스 기사를 봤다. 기사에 따르면 ‘기부자 대부분은 연금에 의지해 살아가는 퇴역군인이지만 육사 정신 실천과 민족정기 함양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으로 적지 않은 금액을 기념관 건립을 위해 내놓았다’고 한다. 나는 육사에서 이승만의 행적에 대해 제대로 가르쳤다면 이런 기부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통틀어 이승만은 군사행동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독립운동 기간 동안 미국 본토, 하와이, 상해 등 각지의 무력투쟁을 모조리 비난했다. 또한 1945년 이후 이승만은 군사력 개발과 적절한 군사방어 프로그램을 복잡하게 망쳐 놓았다. 이승만은 한국의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 애쓴 적이 없다. 그는 오로지 한국을 권위적으로 통제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실제로 이승만의 행적을 살펴보면 올바른 군인정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07년 조선군대가 일본에 의해 해체된 이후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 18,000명의 독립군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동안 이승만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1908년 이승만은 친일파 미국 외교관 스티븐스가 암살된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법정 재판에서 애국자 장인환과 전명운을 도울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윌슨 대통령은 이승만을 미국 정치인들의 꼭두각시로 키우고 있었기에 이승만에게 그 기회를 거절하도록 했다. 이승만은 비겁하게도 총기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돕는 것이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 애국자들을 돕는 것을 거부했다. 이것은 어떤 군인 정신에 기반한 것인가.
미국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무력항쟁을 주장했던 애국자는 이승만이 아닌 박용만이다. 이승만은 박용만이 이루어낸 모든 군사적 발전을 비난했다. 대한인국민회 당시에도 이승만과 박용만 사이에는 심각하고 추악한 폭력충돌이 있었다. 온라인 기록보관소에서 확인한 1915년 하와이 호놀룰루 신문은 이승만이 박용만을 포함 대한인국민회 회원 다수를 살해할 것을 그의 추종자들에게 사주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의 불법행위와 폭력행위를 처리하기 위해 하와이 경찰이 개입해야 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이승만을 기생충(Parasite)이라고 칭했다. 그는 “이승만은 돈 버는 일자리를 얻은 적이 없고, 다른 한국인들의 기부로 생계를 유지했다”며 “이승만은 교활하게 독립운동가들의 주머니를 털었다”고 비난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하야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1940년 김구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을 때 이승만은 미국에서 광복군을 지원하기 위해 모은 자금을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심지어 이승만은 김구와 광복군을 지원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 과도하게 지출을 했다는 기록이 많이 발견된다. 이것이 무슨 군인 정신이란 말인가.
블레인 하든 작가는 2017년 출간한 ‘King of Spies’(스파이들의 왕)에서 1946년부터 1957년까지 이승만과 미군 첩보부대 책임자 니콜스의 관계를 통해 비도덕적이고 악의적인 두 사람의 공통점을 밝힌다. 이승만에 대한 미국 CIA 프로필 자료에는 “지성은 천박했고 행동은 비합리적이고 유치했다”며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집단을 압살할 것”이라고 기술돼 있다. 맥아더 장군과 미 국방부, 국무부는 한결같이 “이승만이 문제”라고 보고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에 악의적인 국가원수였다.
도산의 큰 딸인 나의 어머니 수잔 안 커디(Susan Ahn Cuddy)가 이승만을 경멸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925년 이승만이 도산을 볼셰비키라고 허위고발을 해 체포되도록 사주했을 때 그녀는 10살이었다. 그녀는 성장하여 미 해군에서 포술장교로 근무한 후 1946년부터 1951년까지는 미 해군 정보국에서 일했다. 1952년부터 1959년까지는 국가안보국(NSA) 소련본부에서 최고 분석관으로 재직했다. 즉 그녀는 직무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승만의 부패와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수잔의 남편인 프랜시스 커디는 미 해군 암호 해독자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 암호를 풀어 큰 승리를 거두는데 기여했다. 그는 1950년대 후반까지 요코스카 해군 기지에서 국가 안보국 암호 해독가로 근무했다. 프랜시스의 여동생인 테레사는 33년 동안 연방수사국 요원으로 근무했는데, 그 중 25년은 에드가 후버 국장의 비서였다. 어머니의 시댁과 친정 가문 모두 이승만의 전 생애에 걸친 부정직과 부도덕에 대해 정확한 공식적, 개인적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운동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될 때까지, 이승만이 실각하고 1960년 망명할 때까지, 그가 한국군과 미군 양측에 관여했던 것은 자랑할 만한 게 없다. 한국의 역사는 육사 동창회의 이승만 기념관 지원을 잘한 일이라고 기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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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안 커디 도산 안창호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