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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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길목에서

2024-03-03 (일) 윤영순 메리옷츠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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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한국에서 손녀가 이화여대에 합격했다는 반가운 봄 소식을 전해왔다. 예나 지금이나 입시생을 둔 부모라면 매일을 노심초사하며 입도 뻥긋하지 못했던 그 심정을 우리도 겪었던 터라 본의 아니게 그 당시에는 반 벙어리 신세가 되어 입시병을 앓았던 옛 추억이 되살아 난다.

최근에 이사 한 곳은 55세 이상이 거주하는 주택단지이다. 언덕위에 대단지를 조성하면서 몇 겹으로 돌아가며 마치 달팽이가 속 살을 감싸 안은 형태로 길가 양 옆으로 단독주택, 타운하우스, 빌라, 콘도가 줄지어 있고 잔디 밭 정원이 소담스럽게 꾸며져 있어 눈길을 끈다. 평소 주택지 만큼은 조용한 곳을 선호해 왔던 터라, 이사를 한 후 지내고 보니 온통 주위가 적막감에 쌓여 있는 예상 외의 분위기여서 적응 하기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만 같다.

이사하기 전에 가볍고 깨어지기 쉬운 가재도구들을 미리 옮겨 놓기 위해 이 곳을 들락이다 우연히 이 단지에 거주하는 한인 부부를 만났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가와 이 지역에서는 각 가정의 ‘프라이버시’를 극히 중요시 한다는 충고 같은 언질을 준다.
그리고 보니, 이곳은 비교적 세련되고 아늑한 분위기여서 중, 상층의 노인들이 젊은 시절 부지런히 재산을 축적한 탓인지 노년 생활을 여유롭게 조용히 즐기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한인부부가 전하는 ‘충고’가 이웃 간에 “벽을 두고 살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얼마 지나진 않았지만 이곳에서 경험한 에피소드 한 가지가 노년세대를 대변해 준다. 단지내에 설치되어 있는 인터콤(intercom) 기기의 사용방법을 알려 준다고 찾아온 이웃에 사는 어느 노인이 자신있게 기기 사용법을 설명하는듯 하더니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며칠이 지난 후 결국 젊은 기사를 대동하고 와서야 겨우 인터콤 통화가 가능해졌다.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세대가 화합하긴 이렇게 어려운가 보다.

며칠 전 남편이 아래 층에서 쿵쾅거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내려 갔다가 모처럼 서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는지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 무슨 일인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인 즉, 아래 층에 거주하는 80세가 넘어 보이는 노인과의 대화가 재미있어 길어졌다는 것이다.

메릴랜드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했다는 그 노인은 신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끝없이 늘어놓았단다. 그는 신의 존재는 머리로는 설명될 수 없고, 가슴으로만 느껴질 뿐이라고. 그 이유는 가슴(heart)은 머리(head)가 이해 하지 못하는 수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나…

노인은 서양장기를 같이 뜨자며, 자신의 집은 항상 열려 있으니, 언제든지 자기 집에서 토론(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을 해 보자고 했단다. 아마도 남편이 동양인이란 호기심과, 한 또래이고 서로 대화를 하는 중에 마음이 상통했던 모양이다. 벽을 쌓아두고 사는 곳이란 한국인 부부의 생각과 대조되는 팔순 백인 노인의 생활 패턴이다.

다시금 취미생활인 글쓰기에 빠저들고 싶은 이 즈음 단지 주변을 따라 만들어진 넓고 긴 산책로를 걷다보면 어느새 수선화가 뾰족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봄은 저만치 골목 어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윤영순 메리옷츠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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