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연민을 측은지심이라고도 하고 불쌍하다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고 있는 불쌍하다는 말의 어원이 쌍이 아니고 홀로인 것이 좋지 않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한자의 ‘사람 인(人)’자도 서로 기대고 있는 모양으로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고 사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한글의 사람과 사랑은 어원이 관련이 있어 보인다.
불쌍하다, 연민의 마음, 측은지심, 가엾은 마음, 애처롭다 외에도 비슷한 말에 동정심도 있다. 20대에 어떤 친구에게서 “동정을 받는다는 사실은 싫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신선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남이 자신에게 연민을 갖는 불쌍한 처지에 놓이고 싶지도 않고, 그런 처지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씩씩한 결의 같이도 들린다.
인간은 약함과 무지에서 출발하여 여러 가지의 시행착오나 실수를 하며 삶을 배워가므로, 긴 인생을 사는 동안 타인에 대한 연민과 자신에 대한 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나와 상관없거나 관여할 수 없는 사람에게도 연민을 느낀다. 그 이유는 어떤 사람이 부딪히는 상황을 내 일처럼 상상하고 느끼고 이해하는 공감능력 때문이다.
공감하지만 어떤 도움도 될 수 없을 때는 슬픔과 무력감을 느낀다.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도 있지만, 남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관대한 마음도 있다. 연민이란 단어가 감정과 느낌에 관한 제한적 단어라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느낌은 물론이고 나아가 행동으로 까지도 연결되는 더 포괄적이고 풍부한 의미가 있다. 연민도 사랑을 촉발시키는, 사랑에 포함되는, 사랑이라는 나무의 가지라고 생각된다.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경이로운 재능과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삶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지식과 지혜에 통달하지 못하고, 나약하며,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해야 하고, 여러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육체적 정신적으로 약하게 태어나서 만나게 되는 여러 문제를 계속 극복하며 살아야 한다. 물질적으로는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고, 정신적으로는 지식과 지혜의 습득, 이웃과의 어울림과 조화에서 오는 만족 추구, 독립적인 삶의 확립,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만나고 찾아가는 길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동물이 인간이다.
지혜롭고 풍요롭기도 하지만 부족한 점들 또한 다양하게 존재한다.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원인은 아직 신비에 싸여있지만,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들을 통하여 성숙이라는 과정이 이루어지므로, 어려움을 겪는 일들이 헛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물질적으로 안정된다 해도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정신적인 사건은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인 것 같다. 언젠가는 죽고, 만났다 헤어졌다 하는 일이 인생의 다반사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잊고 산다.
부처님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싫은 사람이나 원수와 만나는 것도 여러 가지 고통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외에도 누구나 예외 없이 어려움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사실들만으로도 인간은 누구나 연민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우리가 나와 남을 연민함은 나와 남을 부끄럽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우월한 사람이 못한 사람을 동정하는 우열의 문제도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다양한 약점과 강점의 집합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겸손으로 서로 도움이 필요하다.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한국인의 국시이며 교육 이념인 홍익인간의 이념이나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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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옥 포토맥 문학회,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