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교육감의 세배 받기

2024-02-25 (일) 문일룡 변호사, VA
크게 작게
지난 음력 설날에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감을 한 토요 한국학교로 안내했다. 학교 측에서는 원래 나에게만 학생들 수업 모습도 둘러보고 학생들로부터 세배를 받지 않겠느냐고 문의가 왔었다. 그런데 바로 전날 금요일 교육감과의 정기 회동 때 혹시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두말없이 나의 제의를 받아드렸다. 사실 그 날은 오전 10시 반부터 교육위원들과 종일 회의를 하기로 되어 있어 다른 곳을 들르기에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을텐데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토요 한국학교를 음력 설날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방문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왜냐하면 그 학교는 공립학교의 교실들을 빌려서 토요일에 수업을 진행해 왔는데 몇 가지 이슈들을 놓고 공립학교 측과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왔을 때 내가 가교 역할을 맡아 양측이 조금씩 양보해 절충할 수 있었다.
한인 커뮤니티 관련 사안에 있어 내가 나서는 게 당연하면서도 때로는 조심할 수밖에 없다. 카운티 전 주민들을 대표해야 하는 광역 교육위원으로서, 내가 항상 한인 커뮤니티 편에 선다는 인상을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대화는 주선하지만 가능한한 강압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번의 마찰도 내가 교육감에게 직접 얘기했었다. 그래서 교육감도 이미 그 학교를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워싱턴 지역에 상당수의 토요 한국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누차 언급했고, 한국학교와 공립학교 사이에 정보 교류와 협력의 필요성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의 방문은 1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 숫자만 280명 정도가 되고 교사와 보조교사가 각 20명 가량 되는 제법 큰 규모에 놀란 듯했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한국문화의 일면을 체험할 수 있어 유익했을 것이다.


페어팩스 카운티로 오기 전 워싱턴 주 시애틀 시의 외곽에서 교육감으로 일했던 이 백인 여성 교육감이 세배를 받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한국인들의 문화에서는 어른에 대한 공경이 중요시 되는데 세배는 한 해를 시작하면서 그러한 공경의 표시가 가장 잘 드러나는 전통예절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세배는 단지 가족들 사이에서만 하는 게 아니고 학생들이 선생님 댁으로 찾아가 하기도 한다고 알려 주었다. 그만큼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공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이니 그 뜻을 이해하는 듯했다.

이날 세배는 복도에 자리를 차려 놓고 앉아서 받았다. 나야 양반다리에 익숙하지만 교육감은 바닥에 앉는 게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한 그룹의 학생들이 세배를 하고 떠나면 다음 그룹이 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양다리를 쭉 펴보는 것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차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다른 문화를 배우는데 불편한 점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스스로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육감이 그 날 배운 또 다른 하나는 세뱃돈과 덕담이었다. 세뱃돈은 내가 봉투에 미리 준비해 온 것을 교육감에게 일부 나눠줘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세배를 받은 후 학생들에게 새해에 들어 기억해야 할 좋은 말 몇마디를 어른들이 해 준다고 하자 참 좋은 문화라고 하면서 학생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본인이 사용했던 세뱃돈에 대해 미안했던지 나한테 나중에 갚겠다고 했다. 물론 그럴 필요 없다고 답하면서 내가 가지고 왔던 세뱃돈에 대해 설명을 보탰다.

“사실 약 2년전 토마스 제퍼슨 과학고등학교의 체육관을 내 이름으로 명명하는 축하식이 열렸다. 그 때 지역 한인 사회의 한 어른이 복주머니를 하나 가지고 오셨다. 그런데 그 안에 2불짜리 신권이 50장이나 들어 있었다. 그 분은 은퇴하신지도 이미 여러해 되어 수입도 없으셨다. 연세도 내 부모님 또래였는데 참 고마웠다. 그 돈은 그동안 아까워 쓰지 않고 복주머니에 그대로 넣어 두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복주머니를 열어 그 어른이 나에게 주시고자 한 복을 어린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 나 나름대로도 참 흐믓했다.” 이런 내 설명을 듣는 교육감의 얼굴에 무언가 가슴으로 느끼는 게 있음이 드러났다. 여러모로 보람된 음력 설날 아침이었다.

<문일룡 변호사, VA>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