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얘기는 1960년대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 한 청년의 가슴 아픈 추억으로 부터 시작된다.
나는 그때 결혼한지 얼마 안되는 신혼이었고 남편과 저녁밥을 먹을때 밥상에 무우채나 무우국을 올리면 남편은 절대 먹지 않았다. 왜 무우를 먹지 않느냐고 물으면 묵무무답이었다.
나혼자만 무우반찬을 먹자고 상에 올리기도 뭐해서 그 후론 무우나물이나 채는 더이상 올려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괴로운 양 그 가슴 아픈 사연을 들려 주었다. 남편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 평소 말수가 적고 착실한 어느 후배와 마음이 맞아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는데 겨울방학이 되어 그 후배는 자기집을 한번 방문해 보라며 초청을 하게된다. 그해 겨울방학 중간쯤 되었을때 남편은 큰맘 먹고 후배의 집을 찾아 가는데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면서 또 얼마를 걸어서 찾아 간 후배의 집과 동네는 산으로 둘러 싸인 숲만 보이는 산간벽지의 마을이었다.
아니 이런 산골에서 어떻게 서울 유학을 하고 있었을까하고 의아해 하며 도착한 마을은 대대로 무우농사를 지어 시장에 내다 팔아 곡식을 사와 생계를 유지 하는 벽촌이었다.
땅이 척박해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지을 땅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 그 해 겨울은 무우농사가 흉년이 들어 시장에 내다 팔지 못하고 볼품 없는 무우들은 김치나 장아찌를 만들고 남은 무우들은 무우말랭이를 만들고 무우 이파리들은 처마 밑에 매달아 씨래기를 만들며 그 긴 겨울 보릿고개를 넘기고 있었다. 이 마당 저 마당의 멍석 위에는 스잔한 바람속에 무우말랭이가 만들어 지고 있었다.
그때 후배의 집을 가보고 남편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가난과 궁핍과 숲속의 외딴 마을을 보고 후배의 이 어려움울 전혀 몰랐고 도움을 줄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오는 자괴감과 자기만 호의호식했다는 부끄러움과 자책감에 괴로워하였다. 후배의 그러한 형편과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자기만 호강한 것 같은 착각에 시달리기도 하였고 무우를 보면 후배 생각이 나고 무우 말랭이와 씨래기가 어른 거려서 그만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후론 두번 다시 무우를 먹을 수가 없었다.
결혼 후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나는 무우에 얽힌 애달픈 사연을 듣고 두번 다시 무우반찬과 국반찬을 밥상에 올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또 흘러서 몇십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 화창한 가을 한국식품점에 장을 보러 갔다가 너무도 깨끗하고 살이 통통 오른 가을의 맛갈스러운 무우를 보고 그만 충동적으로 사서 어릴 때 먹어 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석박지를 담갔다. 이 무우김치가 어찌나 맛있는지 밥 한그릇을 다 비우고 나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맛있는 무우김치를 왜 여태 안 먹었지?”
이제 무우를 먹자. 이제 죄의식에서 벗어나자. 정작 무우말랭이의 주인공은 현재 서울의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있지 않는가? 그때의 가난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후배의 산골 마을 주민들은 허리끈을 졸라매며 배고픔을 참고 보릿고개를 지나며 십시일반 돈을 모아 후배의 의과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였고 후배는 그에 답하여 촌철살인으로 노력하며 인간승리를 구현하였다. 그 산골에서 서울 가려면 버스와 기차를 몇번 갈아 타면서 가야 했던 그 길을 무사히 오고가고 하면서 오늘을 만들어 내었다.
1970년대 우리가 미국으로 오게 되면서 그 후배와의 연락은 두절 되었지만 그는 영원히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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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자 엘리콧시티,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