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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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선교를 생각하며 건축선교를 떠나다

2024-02-04 (일) 이길혁 국제난민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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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의 젊은이가 부귀영화 모든 것을 버리고 머나먼, 그리고 암울한 조선 땅을 그리워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14세에 옥스포드 대학에 조기 입학할 만큼 천재적인 소년이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선교사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님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나는 믿음 생활하면서 토마스 선교사님에 대한 감사가 있었고, 언젠가는 내가 그 분이 섬기면서 동기부여를 했던 곳이 어떤 교회가 가 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안고 지난 주일 오후 예배 마치고 평소 사용하던 공구와 현지 선교사님의 가족을 위해 몇 가지 준비해서 떠난 곳이 영국 웨일스 선교지인 이성수, 백나나 선교사님의 사역지였다.

어린 세 딸들과 함께 웨일스에 온지 5년 반. 하나님이 주신 마음 하나로 초, 중, 고등학생 세 딸을 데리고 왔는데 영국의 물가가 너무 비싸고 주택 랜트비가 1년마다 상승하니 견디기가 힘들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주거 공간과 다목적으로 쓰일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재정관계로 2년 반이나 비워 둔 주택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웨일스는 비, 바람이 많은 지역이라서 비워 둔 집에는 곰팡이가 가득하여 구경하기 조차 힘이 들었고,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는 집을 구입했는데 기도 가운데는 늘 평안한 마음이 있었단다.

그러다 한참 후에 나에게 연락이 되었는데 현장 사진을 보는 순간 전문가인 나도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기도 가운데 뉴저지에서 한 분, 한국 영덕에서 한 분이 건축선교팀으로 급조되어 웨일스로 모였다.

각 파트별로 전문가인 만큼 작업은 순조로웠다. 물론 주자재와 소모자재가 평소 사용하던 것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좀 혼란스러웠지만 전문가들 답게 해결 또한 잘하였다.
힘들지만 이곳에서 사역하시는 이 선교사님을 생각하면 표현을 할 수 없다.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 내부 공사는 마무리되어 갔다.

귀국하는 날,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1904년 웨일스 대부흥을 이끌었던 모리아 교회를 찾았다. 웨일스 자체가 시골이지만 모리아 교회는 더 시골이었다.

가난 때문에 12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탄광촌에서 일하던 아이가 청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다. 성령님의 강열한 임재를 느끼며, 지역부터 전 영국을 회개의 바람을 일으키며, 인도, 중국, 미국을 넘어 1907년 한국의 평양 대 운동까지 영향을 미친 청년 “이반 로버트” 그 교회 앞에, 무덤 앞에선 겸손할 수 밖에 없었다.


잠시 자동차로 이동을 하여 우리에겐 너무나 잘 알려진 ‘토마스’ 선교사님의모교회인 ‘하노버교회’를 찾았다.

이곳 역시 아주 시골 동네, 작은 교회였다. 약 30평(1,000sq)의 작은 예배당과 부속 건물이다. 그 아래쪽은 토마스 선교사님의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 목사님의 사택이 있다.
하노버교회 앞 마당에 비석들이 즐비하다. 토마스 선교사님의 한 알의 밀알은 모두가 익히 알지만, 이 비석들의 주인공에 대하여 누구도 언급한 바 없다.

얼마나 기도했을까? 젊은 우리 교회 청년이 이름도 생소한 조선 땅에서 순교했다니, 토마스 선교사는 순교했지만 한 알의 밀알이 헛되지 않게 해 달라고 수 많은 시간을 기도하다 천국가신 흔적의 비석들. 수 많은 비석들이 서 있는 교회 앞마당의 잔디밭 밟기가 미안하다. 오랜 세월 지나면서 이끼를 가득 머리에 이고 있는 이 비석들의 주인공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기도하다 쓰러지는 무명의 믿음의 선진들 처럼, 비뚤어진 채 서 있는 비석을눈물이라도 닦아주듯 온 몸으로 감싸 안아 주는 까만 이끼가 고맙다.

<이길혁 국제난민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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