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기간 이승만의 행적은 사뭇 달랐다. 도미하여 장로교단과 대학측의 예외적인 혜택을 받아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학위를 받고, 1912년 하와이에 상륙한 이후에는 친일성향 감리교 감독 와드만을 등에 업고 박용만의 국민회에 대항하여 자기세력화에 몰두하였다.
권모술수로 하와이 한인사회를 접수한 그는 재정까지 손을 대 마침내 1918년 ‘재정 흠축사건’이 발생한다. 내부감사를 받던 중 증빙서류를 요구한 직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도, 오히려 그 직원을 살인미수로 고소한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이승만의 비틀린 심리상태와 미국, 일본에 대한 외교노선과 사상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장면이다.
“저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국민군단을 설립하여 위험한 배일행동으로 일본군함 파괴하려고 음모를 꾸몄고… 일본과 미국 사이에 중대한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한 자들이니 조치해 달라.”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를 자처하는 자로서 해괴망측한 궤변이면서 사건과 무관한 국민군단을 거론하여 본질을 흐리고 있다. 결국 고소는 모함으로, 살인미수는 증거없다고 기각되었지만, 이승만은 끝까지 분열 책임을 박용만에게 돌렸다.
이에 박용만은 이승만의 작태에 대해 “공적재산을 자기명의로 한 사실이 염치없고, 국민군단의 항일운동을 국제평화를 깨는 음모라는 법정진술은 독립운동을 음해하는 악독한 행동”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결과적으로 대한인국민회의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한인사회는 분열되고 만다. 그 동안 샌프란시스코 일본 총영사의 방해공작은 집요했고, 마침내 1917년의 대흉작과 재정곤란 까지 겹쳐 사관학교는 문을 닫게 된다.
이후 박용만은 1919년 5월 블라디보스톡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국민군에 합류하여 대한국민군을 조직해 간도, 하와이, 국내에 독립군단을 설치하고 연해주를 총본부로 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추대되었으나 그는 군사주의에 뜻이 있음을 사유로 임직을 고사하고, 신채호, 문창범 등과 연해주로 부터 러시아로 군사거점을 옮기는 계획을 실행한다.
마침내 1922년 경에는 중국군벌과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독립군기지 건설을 추진하는 한편, 자금 마련과 북만주 지역의 독립군 수용을 목적으로 농장을 개척하고 흥화실업은행을 세우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1928년 10월17일, 의열단원 이해명 등은 군자금 요청을 빌미로 면담을 하던 중 47세된 불세출의 독립운동가 박용만을 저격한다. 두 번의 조선 입국을 했던 일이 밀정으로 오인되었던 것인데, 그의 행적을 잘 알던 독립운동가 김홍범, 박용철 등 수많은 인사들과 그에게 도움주었던 국민군 고위 장성들이 사후에 그의 결백을 증언하였다.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운동을 이론화하고 끊임없이 실행에 옮긴 박용만은 정체성이 의심스러운 ‘철학박사’ 이승만과는 동이 서에서 튼 것 같이 달랐다.
박용만은 단호하게 자주적으로 힘을 길러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했으며, 친미 사대주의자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을 정면 비판했다. 이승만은 실제로 나중에 국민 다수의 뜻에 반하여 미군정 하에 선거를 통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에 동의한다.
박용만은 항상 화합과 대동, 연합을 모색하였다. 여러 갈래로 나뉜 독립운동 세력들을 규합하고 모으는 일에 진력했다. 그에 반해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들 마저 두 패로 갈라놓은 장본인이었고, 탄핵사유에 밝혔듯이 상해임정의 독립운동에 크게 걸림돌이 되던 자였다.
박용만은 자주독립이라는 대의에 몰두하였고 자신의 입신과 양명에 무관심했다. 전제주의를 부정하고 삼권분립의 공화제와 민주국가를 주창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해방된 반쪽의 조국에 돌아와 제왕적 독재자로 군림하였다. 친일파를 대거 기용하고, 폭력을 동원하여 국회를 무력화했으며, 국민의 복리를 외면하였고 “쌀이 부족하면 빵을 먹지” 할 정도로 현실인식이 천박했다.
한글을 지켜내면 언젠가 나라도 되찾는다며 우리말과 글을 중시하여 한글독본을 저술한 바 있는 민족주의자 박용만은 허황된 꿈을 꾸는 몽상가가 아니었다. 새로운 일을 연구고안하여 뜻을 함께 펴나갈 동지와 독지가를 모으고, 자금확보에 주력하여 실천에 옮겼다.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락과 결집에도 몰두하였으며, 서거하는 날까지 그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에 대해 국부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최근 워싱턴의 한국대사관에 그의 동상을 세우는 계획이 현 정부의 협조하에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의 공과 과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애민정신과 역사의식이 결여된 그에게 국부란 가당치 않으며, 두 번이나 탄핵을 당한 자에게 논공은 무의미해 보인다.
그는 국군통수권자로서 6.25한국전쟁 당시 전황에 대해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정작 자신은 도망가면서 한강다리를 폭파하여 70여명의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켰다. 또한 전쟁을 전후로 7년 여 동안 3만명의 제주도민을 무차별하게 빨갱이로 몰아 희생시킨 데 대한 역사적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 바로 이승만이다.
동상을 세우려면 이승만이 아니라, 항일 무장투쟁론을 주창하고 목숨을 바쳐 실천했던 박용만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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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공렬 민족문제연구소 워싱턴DC지부>